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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남세아 Aug 13. 2022

내가 해야 할 소명

#여름 #크리스마스 #사진 #죽음 #소명

8월의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초원사진관이다. 1998년 갑자기 나타난 초원사진관은 고등학교 삼 년 동안 사진부로 활동하고 막 졸업한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친구에게 빌린 사진기로 세상을 찍어대며, 어둑암실에서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했다. 서툴지만 이야기가 담긴 사진을 걸어두고 서로의 생각을 나눴다. 그때부터 사진과 함께하는 이야기를 좋아했는데, 그때는 글을 쓰지 않다 보니 제목 정도만 신경 썼고 사진에 대한 생각과 감정은 대화로 주고받았다. 


스무 해 넘게 흐른 지금도 사진을 자주 찍는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놓고 글을 더하면 마치 하나의 작품이 된 것처럼 뿌듯함을 느낀다. 미술 작품이 해설집을 통해서 관객과 더욱 소통하거나 박물관의 도슨트를 통해 유물의 의미를 선물 받는 것처럼 이야기는 사진에 영혼을 심어준다. 하지만, 사진은 찰나의 순간을 담기 때문에 모든 게 멈춘다. 단순시간뿐만 아니라 피사체 생각과 감정까지도 잠시 쉰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한석규 역)이 스스로 영정사진을 찍는 장면을 보면서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모습이 애절했다. 어쩌면, 정원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세상을 떠나기 힘든 마음 때문에 모든 게 멈춘 사진 속에 담기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는 세상에서 사진 속에 홀로 멈춘 피사체는 외로울 것 같았다.


영화가 개봉한 지 이십 년이 넘었지만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초원사진관에 걸린 아름다운 다림(심은하 역) 사진보다도 더 크게 다가온 장면 중 하나는 사진관을 찾은 할머니 씬이다. 가족과 단체 사진을 찍고 홀로 다시 사진을 촬영하는 장면이다. 할머니가 영정사진을 찍는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졌는데, 그때 느꼈던 감정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다. 언젠가는 동일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아서 머릿속에 새겼을 것이다. 더군다나 연기한 배우께서 영화 개봉하고 몇 해 지나지 않아서 돌아가셨는데, 실제 영화에서 촬영한 영정 사진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배우로서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장면과 사진이 현실로 이어진 게 신기하면서도 애처로웠다.


정원이 아버지에게 리모컨 사용법을 설명하는 씬도 기억난. 자신이 죽고 난 다음 남겨진 사람에 대한 배려인데, 설명을 이해 못 하는 늙은 아버지에게 짜증 내는 모습과 사용설명서를 하나씩 적어가며 가슴 아파하는 모습에 더욱 쓰렸다. 우리 부모님도 카톡조차 제대로 사용 하는데, 시간을  설명한다면서 몇 년째 방치하는 나를 돌아보기도 했다.


영화에서 정원은 시한부 환우이지만, 묵묵하게 사진관을 열고 다른 사람사진을 찍으며 남은 하루를 성실하게 산다. 아버지에게 리모컨 사용설명서까지 남기면서 천천히 죽음을 대한다. 정원을 보면서 문득 소명이라는 단어가 생각났고, 이어서 예전부터 좋아했던 노래 하나가 떠올랐다. 소명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곡인데, 듣고 싶어서 오랜만에 찾아서 들었다. 평소 노래 가사를 잘 듣지 못하는데, 유독 가사가 귓가에 머물렀고, 좋아하는 가사를 다시 엮어서 새로운 문장으로 만들었다.


'당신이 아파하고 손길이 필요한 곳에 나를 보내주소서. 내가 해야 할 소명을 다하고 먼 훗날 당신 앞에 나설 때 나를 안아주소서.'


글을 쓰면서 아니 마흔 해를 넘게 살면서 다시, (잘못 말하정할 때 사용하는 군대식 표현) 스무 해를 넘게 같은 일을 하면서 소명에 대해 꾸준하게 고민했다. 하는 일이 무엇을 향하는지 나는 무엇을 바라는지 계속 곱씹었다. 하지만, 지금껏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폭우로 가득했던 한 주 동안 잠시 멈추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사진과 죽음 그리고 부족한 소명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한 여름 크리스마스에 흠뻑 빠져서 허우적거렸지만 확실한 결론을 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느 한 곳에 닿을 수 있었는데, 어쩌면 지금껏 찾지 못한 내가 해야 할 소명일 수도 있다. 


1998년 학교를 졸업하는 삶의 전환 시기에 만났던 처럼 올해도 어김없이 8월 크리스마스를 만날 수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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