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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남세아 Jun 25. 2021

네 눈에 비친 세상, 그 속의 나

I0234_ep.2 세상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큰딸 세영

내 삶을 구성하고 있는 너희들에게 보이는 세상은 어떨지, 그리고 그 속의 나는 어떤지 궁금하다.

각자의 말과 글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다 같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라서 혼자 북 치고 장구 쳐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네가 되어서 세상과 나를 바라봐야 한다. 현실에서 네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니 네 눈에 비친 세상을 세밀하게 들여다봐야겠다.


##세영이 눈에 비친 세상과 나

이른 아침 눈이 떠졌다. 평소처럼 할아버지는 옆에 계신다. 갑자기 아빠가 생각나서 엄마 방으로 갔다. 아빠는 뭘 하고 있을까? 아빠가 자고 있으면 옆에 가서 같이 누워야지.


문을 열었는데 아빠가 안 보인다. 커튼 뒤 베란다 불빛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커튼을 걷자. 새벽부터 공부하는 아빠가 보였다.

"아빠, 언제부터 공부했어?"

"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우리 딸 벌써 일어났어? 이리 와 봐!"

그러더니 늘 하던 대로 아빠는 나를 안아주고 뽀뽀해준다. 아빠는 공부하니 난 거실에 가서 티브이나 봐야겠다. 거실 바닥에 거꾸로 누웠다. 리모컨이 말을 안 듣는다.

"아빠, 도와줘"

슈퍼맨 아빠가 찰나에 나타났다. 버튼을 여러 번 누르고 있다. '엄마였으면 벌써 끝냈을 텐데, 그래도 아빠는 조금 느리지만 노력하니까 성공하면 이뻐해 줘야지' 역시 엉겁결에 고쳐줬다.

"역시 우리 아빠 최고"

아빠가 흐뭇해하며 출근 준비를 한다. 난 계속 누워서 거꾸로 티브이를 본다. 이렇게 봐도 잘 보인다. 정말 천재인가 보다. 지나가던 아빠가 나를 이상하게 본다. 저 표정은 뭐지. 관심 없다. 다시 티브이나 봐야겠다. 할아버지가 거꾸로 앉아있고 할머니가 거꾸로 매달려서 밥을 한다. 아빠도 거꾸로 매달려서 출근한다. 이상하다. 세상이 거꾸로 변했다. 아니구나 내가 거꾸로 누워서 보고 있었구나. 드디어 거꾸로 보는 세상을 발견했다. 역시 난 대단하다.


할머니가 거꾸로 매달려서 해준 밥을 맛있게 먹고 고양이 세수를 했다. 어제 할아버지와 정리한 가방을 메고 등굣길에 나선다. 아빠가 조심하라는 7단지 횡단보도에서 좌우 두 번 돌아보고 잘 건너서 학교에 왔다.


(중략)


학원 끝나고 집에 돌아왔는데, 영어 학원에 가방을 놓고 왔다. 수업 끝나고 아이스크림이 너무 먹고 싶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로 갔다. 맛있는 쌍쌍바를 먹으니까 더 배고파서 집으로 빨리 오다 보니 가방을 깜빡했다. 할아버지한테 혼날 줄 알았는데, 다행히 할아버지가 가져오신단다. 역시 난 예뻐서 할아버지가 다 해 준다. 이 세상에서 할아버지가 제일 좋다. 주식해서 돈 벌면 캠핑카 사주기로 했다. 그럼 난 캠핑카에서 살아야지.

근데, 아빠는 뭐하지? 전화해야겠다. 통화가 안 된다. 일을 할 때면 전화기를 꺼 놓는다.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오늘도 늦을 것 같다. 밥은 먹었으니 우선 공부해야겠다. 공부를 다 하고 엄마한테 인터넷을 풀어 달라고 전화했다. 공부 열심히 했으니까 삼십 분 연장해 준단다. 난 한 시간이 필요한데, 그래도 기쁘다. 막 아빠도 퇴근했다. 인사부터 하고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얘기를 해야지. 아빠는 내 얘기를 참 좋아한다. 그래도 서로 할 일이 있으니 짧게 대화하고 각자 시간을 가져야겠다. 아빠는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하고, 나는 새로 나온 아리키친을 봐야 하니까. 결국 나는 아리키친을 보다 또 잠이 들었다.


##

막상 세영이 눈에 비친 세상과 나를 들여다보려고 하니까 함께한 시간이 너무 짧았다. 짧은 대화, 오가다 스친 모습 정도다. 평소 지켜본 딸의 배려심과 충만한 자존감, 엉뚱한 생각, 이상한 짓으로 풀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미안한 기분도 든다. 십 년 뒤면 18살인데, 그때 이 글을 보고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읽어 주기만 해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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