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도서관은 아이들과 함께 방문했을 때도 좋았지만, 조용한 날 아침 혼자서 다시 찾았을 때야 말로 차분한 도서관 분위기를 제대로 즐기기에 적합한 공간이었다.
평소 새로운 장소에 가면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성향인데, 이상하게 한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고 글만 쓰고 싶었다. 아침에 도서관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갔지만 중앙 로비가 잘 보이는 편안한 자리를 마다하고 책 속에 둘러싸인 작은 책상 앞에 앉았다. 가끔 책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이 불쑥 나타났지만 책에 둘러싸여 아늑하고 평온한 기운을 받는 게 너무 좋았다. 더구나 시선이 머무르는 곳마다 보이는 다양한 책 제목과 표지 덕분에 책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적합했다. 엉뚱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사실 나는 독서보다 책을 좋아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책이 있는 공간을 무척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시간이날 때마다 책방과 도서관을 찾아다닌다.
가끔 마음에 드는 도서관을 만나면 주변 동네에 정착하고 싶어 진다. 의정부에는 음악도서관과 미술도서관이 있는데, 두 곳 때문에 의정부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매일 아침식사를 마치고 가볍게 산책하듯 나와서 책을 실컷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한 권을 골라 읽는다면 세상 부러울 일이 없을 것 같았다. 평소 새로운 곳을 좋아하다 보니 익숙해지면 만족도가 낮아지는데, 유독 책이 있는 공간은 익숙해질수록 점점 더 좋아졌다.
아침부터 도서관 기운을 받으니까 독서가 하고 싶어졌다. 읽고 싶은 욕구가 커지면서 글 쓰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보통은 글을 쓰고 싶어서 읽는 시간을 줄였는데,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힘이었던 것 같았다. 실컷 책을 고르고 독서 목록을 만든 다음 하나씩 천천히 음미하고 싶어서 서가를 거닐며 큐레이션 한 책을 모두 훑었다. 미술 도서관이라서 듬성듬성 놓인 책장에 미술 관련 책이 많았고, 빛이 잘 들어오는 넓고 높은 창을 등지고 다양한 책상이 놓여 있었다. 책상은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작품처럼 고급스럽고 아름다웠다. 멋진중년 여성 한 명이 독서를 했는데, 구도와 조도가 적당해서 사진에 담고 싶었지만, 머릿속으로 새기기만 했다. 잘못했다가는 철창신세를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과 책방을 여행하면서 그곳과 어울리는 책을 골라서 읽거나 구매했는데, 미술도서관에서 선택한 책은 '궤변 말하기 대회'였다. 물론 도서관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책을 펼치고 읽자마자 엄청나게 몰입했다. 너무 쉽게 읽혔고 읽으면서 감탄사나 웃음이 튀어나오기까지 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쏟아지는데, 평소 엉뚱하다는 소리를 듣는 내가 무색할 정도였다. 글벗 중에 한 명이 나보고 김동식 작가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말했었는데, 엄청난 찬사였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에피소드를 천천히 읽으면서 화장실만한 번 다녀올 정도로 집중했다. 느리게 책을 읽는 사람이 앉은자리에서 책을 다 읽는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더구나 요즘 책을 나눠서 천천히 읽었는데, 단숨에 한 권을 다 읽었더니 뿌듯함까지 느껴졌다. 책이 유쾌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감동과 교훈을 주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에 다룬 '모든 궤변은 실패한 궤변이다'는 주변을 한 번쯤 돌아볼 만큼 깊게 다가왔다.
예술성 깃든 공간에서 궤변 말하기 대회를 읽으며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어쩌다 보니 엉뚱한 이야기가 예술과 잘 어울리는 듯했다. 일상에서 벗어나서 만난 낯선 경험이 글 세상에서 유영하기 위한 힘찬 발차기가 되었다. 가끔 나에게 선물하는 도서관 나들이는 현실 공간과 책 세상을 동시에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생각과 다양한 감정을 가져다주었다. 앞으로도 도서관 나들이를 통해서 글 세상이 더 넓고 깊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