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휴가를 내고 쉬는 날 가까운 도서관으로 향했다. 집에서 가깝지만 다른 도서관에 비해서 방문한 적없던 곳이다. 휴관일까지 확인하고 찾아갔는데, 도착해 보니 공사로 인한 임시 휴관일이었다. 올해 안에는 못 가겠다고 생각하며 가까운 도서관을 다시 검색했는데, 세 곳이 나왔고 유일하게 화정 도서관만 휴관일이 아니었다.
도서관에 도착할 때 즈음 멀리서부터 낡은 건물이보였다. 진입로는 좁았다. 좁은 도로를 따라 도서관 주차장으로 들어가려는데, 차량이 가득 차다 못해 통행로 중간까지 주차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동네 주변을 몇 바퀴 돌았지만, 주차공간은 보이지 않았고 시간만 계속 흘렀다. 심각한 주차난과 낡은 도서관을 뒤로하고 돌아가려는 순간 도서관 가까운 쪽 주차공간이 눈에 들어왔고 냉큼 달려가 주차했다.
짙은 녹음과 울려 퍼지는 매미 울음소리가 흐리멍덩한 날씨까지 삼킬 기세였다. 공원이 바로 옆에 있었지만, 모든 게 복잡하고 어수선했다. 도서관 앞으로 다가가자 건물 전체에서 습한 기운과 낡음이 느껴졌다. 꿉꿉하게 다가온 도서관은 입구 머릿돌에 새겨진 3년 전 리모델링 기록 덕분에 그나마 안도감을 주었다. 하지만, 정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다시 한번 숨이 막혔다. 엄청난 인파였다. 도서관을 다니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규모가 제법 큰 열람실과 종합자료실 안에 모든 책상은 사람과 가방이 자리를 차지했고, 휴게실마저도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 욕구를 충족시켜야 했는지 도서는 충분했다. 중간중간에 큐레이팅도 적절하게 해 놔서 구경하기에도 좋았다. 자리는 나중에 찾기로 하고 천천히 책을 구경하다가 7월 바다라는 주제로 모아놓은 책들을 발견했다. 복잡하고 어수선하며 숨이 막힐 듯한 분위기에서 돌파구 같은 느낌을 주었다. 특히, 최은영 작가의 소설 밝은 밤과 비슷한 표지의 얇은 책이 눈에 들어왔다. '바다의 선물, 앤 모로 린드버그 지음'이라고 쓰여있었다. 당연히 처음 본 책이었다. 작가 소개를 보고 흥미가 생겨 프롤로그를 읽었는데, 두 문장을 읽고 반드시 다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주변에 자리도 생겼고 책을 들고 냉큼 자리에 앉았다.
많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서로 다른 환경에서 다양한 형태로,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나와 동일한 문제로 씨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토론과 논쟁을 통해 해결책을 찾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까닭에 내게 다양한 견해와 영감을 나누어 준 수많은 이들에게 이 글을 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라고동으로 시작한 글이 좋았다. 소라고동은 삶의 간소화를 끌어냈고, 달고동은 고독을 다뤘다. 여성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도 한쪽으로 크게 치우치지 않은 느낌이 들어서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잠시라도 자기 내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중요하다는 문구에서 크게 공감했다.
자매가 함께 바닷가에서 보낸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우리 집 두 딸이 비슷한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그런 자매였으면 좋겠다는 이상한 생각도 했다. 사실, 나는 프로필 문구를 자주 바꾸는 편인데, 요즘에 유명한 문구를 가져와서 '폭풍 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운다고' 소개한다. 책을 읽기 전까지는 혼자 잘 추면 되는 줄 알았는데, 살아가는 것은 왈츠나 탱고처럼 상대방과 함께 추는 게 맞았다. 아름답고 멋지게 춤추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옥죄이거나 무리하게 리드할 필요 없이 각자 자신의 춤을 추면서 잘 어우러지면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작가는 이야기를 해돋이 조개에서 굴을 거쳐 아르고노트까지 이어가며 엄청나게 몰입시켰다. 깊고 진솔한 이야기 덕분에 삶을 돌아보는 시간까지 가질 수 있었다. 작가가 서두에 바닷가는 글을 읽거나 쓰거나 사색할 만한 적당한 장소가 아니라고 했는데,막상아르고노트쯤 읽다 보니반드시 일주일 이상 바닷가에 살고 싶은 버킷리스트까지새기게 되었다.
백오십 쪽 정도로 짧은 에세이라서 두어 시간 만에 다 읽었다. 섬세한 감성이 전달되었고 많은 단상을 가져다주었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점은 책 구성과 흐름이었다. 조개껍데기를 하나씩 이어가면서 작가 생각과 삶의 해결책을 건네주었고 나에게 잘 닿았다. 버림과 여백 그리고 지금과 여기에 대한 중요성도 깨달았다.
책을 다 읽고 작가가 궁금해서 한글로 검색했더니 남편 찰스 린드버그와 아들 존 린드버그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오는데, 소중한 책을 선물하고 전미 도서상까지 수상한 작가에 대한 소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위키백과에 직접 편집해서 써놓고 싶었지만, 부족한 글 솜씨로 작가 명예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다른 분들에게 양보했다. 마지막으로 책 뒤표지에 쓰인 작가 딸의 책 소개 글을 읽으면서 자녀에게 전해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는 욕망도 생겨났다.
책을 다 읽고 감정과 생각을 활자로 간단히 옮긴 다음 도서관을 나왔다. 여전히 사람은 많았고 매미는 귀를 찢을 듯 울어댔으며, 습한 날씨에 건물도 함께 울었다. 하지만, 화정 도서관에서 선물한 바다 덕분인지 주차장 바닥에 너부러진 돌멩이는 아르고노트같았고 공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향긋한 바다 냄새를 담아 나를 감싸는 게 느껴졌다. 여름을 사랑하는 사람이 바다에 모이듯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도서관에 북적거리는 것은 충분히 유쾌한 일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으면서 도서관을 나서는 발걸음도 한껏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