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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남세아 Jul 28. 2023

다섯 살이 숫자를 그리는 이유


막내가 자기 몸통만 한 스케치북을 펼칩니다. 연필을 움켜쥐고 유치원에서 익힌 숫자를 그림 그리듯 정성 들여 천천히 그립니다. 느리게 그리다 보니 숫자가 가는 길이 보이네요. 누구는 당당하게 다른 누구는 조심스럽게 각자 가야 할 길을 찾아 천천히 걷습니다. 숫자가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나름의 의미 가지네요.  위한 수단이나 화폐 단위 또는 서로를  세우는 정도로만 생각하며 휘갈겼다면 전혀 알 수 없던 세상입니다.



일은 겸손합니다. 자신이 가야 할 길도 확하게 압니다. 그래서인지 처음부터 힘껏 점을 찍으며 등장합니다. 이어서 지체 없이 아래로 내려갑니다. 반듯하게 내려가다가 끊어야 할 곳에서 정확히 멈추네요. 한결같이 겸손하게 바닥을 향하다 보니 지나온 길도 곧게 뻗었습니다. 일은 겸손과 결단력을 통해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존재가 됩니다.


이는 눈치를 봅니다. 일과 마찬가지로 힘껏 점을 찍고 등장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높은 곳으로 향합니다. 조금 걷다 보니 거친 상을 만나네요. 조금씩 피하면서 방향을 바꿉니다. 결국, 처음 시작했던 근처로 다시 돌아옵니다. 정신을 차리고 일처럼 빛나기 위해서 다시 힘을 내어 내려갑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겸손하지 못한 자신은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바닥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는 존재가 되었지만 스스로 맨 앞에서 달릴 수 없다는 것을 무척 아쉬워하네요. 그래도 당당하게 서있는 모습이 참 멋집니다.


삼은 복잡합니다. 이를 동경해서 처음부터 똑같은 전철을 밟습니다. 다만, 이나 일처럼 바닥까지 내려갔던 겸손익히지 못했나 보네. 한 바퀴를 돌아서 시작한 부근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도약하려고 앞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한번 체득한 습성 때문에 다시 돌아옵니다. 그래도 나쁘지 않습니다. 시작과 끝 그리고 중간에 잠시 돌아온 장소까지 비슷한 공간에 머물면서 근사한 형태를 갖췄기 때문입니다.


사는 거칩니다. 일처럼 겸손했지만 과하다 보니 무리하게 틀어서 내려갑니다. 결국, 오래가지 못하네요.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다시 방향을 바꿉니다. 힘껏 나아가다가 스스로 숫자를 완성했다는 생각에 제자리에 멈추네요. 하지만 아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결국 처음 시작한 곳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제야 진정한 겸손을 알게 됩니다. 일이 간 길을 그대로 따라갔지만 처음에 거칠었던 흔적이 남다 보니 다들 조금은 꺼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걱정 없습니다. 충분히 많은 숫자들이 부러워하며 누구나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는 우유부단 합니다. 일부터 사까지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한참을 가다 보니 자신만 다른 게 겸연쩍습니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일이나 사처럼 겸손하게 내려갑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생각을 바꿉니다. 본인은 일과 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이와 삼이 던 길을 따라갑니다. 어느덧 시간이 다 되었고 일부터 사까지 조금씩 닮은 모습이 됩니다.



육은 후회를 합니다. 일이 될 수 있었지만 자신을 끝까지 믿지 못하고 오던 길로 돌아갑니다. 잘못된 방향을 깨달았다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도 되는데, 포기하고 멈춰 섭니다. 이미 지나왔던 어느 지점에 멈추다 보니 오조차 될 수 없는 자신이 보입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입니다. 더 나아갔다면 숫자가 아닌 리본이 되었거나 팔이 될 수도 있었거든요.


칠은 고민이 많습니다. 남들처럼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아래로 향합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서 멈춥니다. 자신이 가는 길이 맞는지 돌아보네요. 그래서인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이번에는 진취적으로 나아가 봅니다. 하지만, 머지않아서 다시 멈춥니다. 남들보다 앞서 나가는 것보다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시 아래로 향합니다. 어느덧 바닥에 닿았고 개성 있는 형태를 갖춥니다. 여러 번 고민하고 자신을 낮춘 덕분에 근사한 모양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운이 깃든 숫자라면서 무척 좋아하네요.


팔은 한결같습니다. 어디에서 시작하더라도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신념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점에서 시작해서 멀리 나가지 않고 다시 안쪽으로 돌아옵니다. 중간 정도 나아가다 처음 지나친 길을 횡단하며 주변을 살핍니다. 자신이 처음 시작했던 곳을 바라보며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굽이돌아 처음 자리로 돌아옵니다. 결국, 누구나 쉽게 그릴 수 있는 친근한 존재가 됩니다.


구는 완벽합니다. 영롱한 존재인 동그라미를 먼저 그리는데 아무 데서나 시작하면 큰일 납니다. 항상 오른쪽 끝에서 시작해서 왼쪽으로 향한 다음 다시 원을 그리며 시작 지점으로 돌아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큰 수가 되었고, 하나만 더해지면 차원이 달라지는 존재가 됩니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영은 영롱합니다. 팔처럼 처음 시작한 곳과 끝나는 장소가 정확하게 일치하네요. 다만, 팔처럼 이쪽저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안쪽을 바라보며 끝까지 천천히 움직입니다. 중간에 모질게 끊거나 변덕이 생겨서 갑자기 틀어버리는 경우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움직입니다. 덕분에 마지막에 다다르면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뜻하기도 하고 옳거나 바르다는 징표가 되기도 합니다.



막내가 그리는 일부터 영까지 숫자는 각자 가는 길이 달랐지만, 자신의 길을 끝까지 가면서 세상에 존재감을 뽐내는군요. 불길하다는 사나 행운이 깃든 칠이나 완벽한 구까지각자 자신의 역할이 있습니다. 만약 세상에서 숫자 중 하나만 사라진다 해도 엄청난 혼선이 오겠지요. 그래서 모두 소중합니다. 그나저나 제가 가는 길은 어떤 숫자와 비슷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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