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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남세아 Aug 01. 2023

일상에서 찾는 행복한 순간

 

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를 돌아봤습니다. 매번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는 삶에서 내 세상과 접촉했던 다양한 형체와 장소가 어떤 감정과 생각을 주었는지 궁금했습니다. 눈을 뜨고 있을 때 정신없이 스친 만남을 찰나의 감각만으로 기억하는  아쉬웠습니다. 더구나 하루가 지나면 망각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활자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한 순간 한 순간을 곱씹어야 했고, 천천히 하루를 되돌아보면서 행복한 순간을 다시 한번 만끽했습니다.




맥주 한 캔


하루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눕기 전에 고심했습니다. 며칠 전 지인에게 받은 선물이 저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요즘 구하기 어렵다고 해서 인기가 한풀 꺾이면 구입하려고 했는데, 우연히 동료가 여러 개를 샀다며 나눠준 레어템입니다.

이틀 전 우리 집에 도한 두 녀석은 저와 한 몸이 되기 위해서 2° 이하 혹한에서 48시간 동안 모든 준비를 마치고 냉장고 최상단 가장 좋은 위치에서 저를 애처롭게 쳐다봤습니다. 눈길을 외면할 수 없었지요. 녀석들과의 황홀한 왈츠 생각은 식단과 관리를 위한 노력과 의지를 말끔하게 지웠오직 카르페 디엠만 외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두 녀석 중 한 녀석을 납치했습니다. 책상에 앉아서 신성한 의식을 행하려고 하니까 눈앞에 보이는 낙서 가득하고 찢어진 벽지가 거슬렸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벽지에 낙서하고 찢은 자의 산리오 스케치북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 신성한 의식에 적합한 배경이라고 판단하여 거침없이 가져다가 무대를 설치했습니다.

PX에서 모셔온 다낭산 쥐포까지 완벽히 준비한 상태에서 영롱한 '아*히 슈퍼 *라나마비루 캔'을 등장시키자 제 심장은 요동쳤습니다. 입 좌 우측 끝 두 입술이 만나는 부근에서 침샘이 터졌는지 침이 질질질 흘러나왔습니다. 머릿속 편도체는 사라졌고 오감을 느끼기에 적합하도록 모든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다른 캔과 조금 다른 뚜껑을 열기 위해서 왼손은 거들 뿐, 오른손 검지로 힘껏 잡아당기며 성스러운 오라(aura)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정성이 부족했는지 뚜껑을 개봉할 때 한 번 피식 비웃더니 다소곳한 모습으로 저를 마주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거북이처럼 목을 힘차게 앞으로 빼내어 녀석의 깊은 골짜기를 살폈습니다. 크레바스처럼 깊은 흑갈색 협곡 사이에서 하얀 오라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통과정에서 사라진 게 아닐까 걱정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모금 가득 들이켰는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녀석이 목젖을 타고 식도를 거쳐서 위까지 단숨에 들어가는 게 느껴졌고, 연약한 제 위장에 닿은 녀석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짙은 갈색 액체 속에 꼭꼭 숨겼던 오라를 뿜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위장에서부터 식도와 목젖까지 동시에 화학반응이 일어났고 누구보다도 빠르게 제 미간과 왼쪽 눈가로 소식을 했습니다. 유튜버 마츠다 부장님 보다도 멋진 찡그림을 날리며 생애 가장 맛있는 맥주를 영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평범한 저녁식사


맥주를 한참 즐기다 보니 저녁 식사 때가 생각났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지인이 알려준 돈가스 집을 찾았습니다. 여러 번 찾아가려다가 하루는 가게가 쉬는 날이었고 다른 날은 갑자기 치킨이 먹고 싶어서 발을 돌렸습니다. 오늘은 반드시 먹겠다는 의지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에 조용하고 작은 동네로 찾아갔습니다.

가게는 동네 분식점 정도 크기로 아담했습니다. 우중충한 날씨에 무뚝뚝한 사장님 그리고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듯한 인테리어가 어우러지면서 근심만 쌓였습니다. 이른 시간이라 손님도 없었는데, 유독 느리게 나오는 음식 덕분에 긴장감만 커졌습니다.

마침내 무뚝뚝한 사장님께서 음식을 들고 다가왔습니다. 쟁반에서 돈가스를 가볍게 내려놓으며 아이들 생각해서 밥을 따로 더 가져왔다는 어울리지 않는 친근한 말씀을 건넸습니다. 예상치 못한 친절에 당황하며 감사 표현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사실, 주전부리도 많이 먹었고 조금 이른 저녁이다 보니 2.5인분 밖에 안 시켰기에 살짝 눈치를 보던 터였거든요.

외강내유 사장님은 다음 쟁반을 들고 오며 공깃밥 한 그릇을 더 가져다주고 멋쩍은 미소까지 날렸습니다. 순간 저에게만 보였던 사장님 심술보는 말끔하게 사라졌고 환한 천사 날개가 비쳤습니다. 최근 들어 먹었던 돈가스는 대부분 연한 붉은빛에 일본식 돈가츠가 많았습니다. 스테이크 굽기 정도로 미디엄 레어나 레어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앞에 놓인 고기는 미디엄 웰던이나 웰던 정도였습니다. 뻑뻑하겠다는 생각으로 한 입 베어 물었는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이들에게 먹이기 부담스러웠던 레어 돈가스의 부드러움이 느껴졌는데, 횡성 투뿔 한우 안심살을 참숯에 살짝 불 맛만 나게 데친 듯, 오호츠크해에서 방금 건진 혼마구로 가마도로를 소금만 뿌려서 입에 녹인 듯한 부드러움이 느껴졌습니다. 다시 한 점을 더 먹기 위해서 평범해 보이는 장국을 마시자 제주 애월이나 여수 앞바다에서나 느낄 수 있었던 짙은 바다향이 다가왔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 먹어 본 돈가스 중 단연 최고의 맛이었습니다.



다 있는 시장


저녁 식사 전까지 별마당에서 오랜 시간 머물렀습니다. 특별한 목적 때문에 찾아 간 게 아니고 폭염과 변덕쟁이 날씨로 야외 활동이 수월하지 않다 보니 자주 찾게 됩니다.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개장했을 때부터 수년 동안 열심히 다녔지요. 주로 아이들 장난감 가게와 찜질방, 물놀이장을 애용합니다.


별마당 안에 크고 작은 시장도 자주 갑니다. 특히, 오천 원 이하 상품만 다양하게 파는 곳을 아이들이 좋아해서 늘 들릅니다. 다 있거든요. 갈수록 제품군이 많아지는 게 신기한데, 언젠가는 칠천 원이나 만 원짜리가 나타날지 모릅니다. 시장은 늘 그런 곳이니까요.


아이들이 착한 일을 했다고 우리 집 삼천 원 상품권을 발행했습니다. 첫째는 천 원이나 오백 원짜리 여러 개를 담아서 양을 늘리며 욕구를 충족합니다. 막내는 이천 원짜리 두 개 또는 삼천 원 짜리와 천 원짜리 하나씩을 집어 들고 와서 떼를 씁니다. 분명, 덧셈을 할 줄 아는데도 반칙을 합니다. 떼쓰는 게 심해지면 모두가 곤란한 상황이 되니까 첫째가 이천 원어치만 사고 천 원어치를 동생에게 양보합니다. 한 놈은 잘 키웠고 다른 한 녀석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일방적으로 훈훈한 모습은 늘 반복됩니다. 그래놓고 집에 가서 또 싸웁니다. 자매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말하지 못한 비밀


다 있는 시장에서 한 움큼씩 쥐고 나온 뒤 아내 옷을 구입하기 위해 옷 가게에 들렀습니다. 예전부터 함부로 말하기 불편한 똑같은 두 자리 숫자였는데, 옷 가게 상호에 버젓이 들어가 있네요. 가격대가 좋아서 가끔 들릅니다.


다른 사람을 위아래 그리고 좌우로 재단하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저에게 자꾸 묻습니다. 남이 아니기 때문이죠. 저는 늘 정답만 말합니다. AI보다도 완벽하게 학습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표정까지도 신경 씁니다. 갑자기, 샤론스톤이 유명해진 영화가 생각나네요.


옷 가게에서는 매번 재미있는 일이 벌어집니다. 자기 위아래 좌우보다 조금 작은 옷을 입고 싶어 집니다. 아주 조금 작은 옷을 탈의실에서 입어 보면 멋질 줄 알았는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볼품없습니다. 친절한 가게 주인도 분명 비슷하게 보일 텐데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제가 학습한 수준보다 혹독한 수련을 했나 봅니다. 위기 상황에서도 주인은 항상 수려한 언어로 모면합니다. 제품이 작게 나왔다거나 루즈 핏으로 입는 게 더 세련되어 보인다며 슬그머니 다가옵니다. 물론, 한 치수 큰 옷을 들고 오는 순간 옷과 가게가 싫어집니다.


다행히 아내는 불편한 상황 없이 예쁘고 잘 어울리는 옷 한 벌을 건졌습니다. 평소 눈여겨봤던 제품을 골랐기 때문이죠.



사람 없는 양품점


옷 구경이 끝나고 찾은 곳은 사람이 없는 양품점입니다.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공간입니다. 더구나 최근 새로이 입점했기 때문에 기대가 컸습니다. 옷부터 문구용품과 식품까지 모두 있는 또 다른 작은 시장이지만 양품점은 소란하지 않고 평온합니다. 누르스름 한 색을 중심으로 색깔 스펙트럼이 넓지 않고 전반적으로 낮은 채도여서 눈이 평온하기 때문에 피로감이 줄어듭니다.


우리 동네 양품점은 다른 곳과 다르게 아이들이 머물며 그림책을 읽는 공간이 보였습니다. 두 아이는 보증금과 사용료 없이 전세를 냈습니다. 누구나 사용하는 공간은 맞지만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집보다 편하게 즐겼기 때문입니다. 도서관에서 보다 오래 책을 읽는 이유는 기분 탓이겠지요.



잠시 부모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자연 친화적이고 지구를 살린다는 낮은 채도 제품을 둘러봤습니다. 신기하게 제품 군데군데 책이 놓여있습니다. 큐레이팅 한 두세 권 책이 제품과 조화를 이룹니다. 제품에 눈만 가는 게 아니라 손도 따라갑니다. 저는 교양 있으니까요. 양품점은 분명 이윤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 그리고 우리 지구를 위해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제 눈과 귓가에 계속 맴돕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낮은 채도 제품이 장바구니에 수북이 쌓입니다. 하지만, 셀프 계산대 앞에서 평소보다 단위가 높은 숫자 조합이 어색했고, 오천 원 이하 제품이 다 있는 시장과 별 다르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역시 사람이 없는 양품점은 오묘합니다. 숫자로 깨우침을 다 주네요. 그들이 추구하는 대로 우리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 장바구니 안에 모든 것을 다시 놓아주고 자연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니 다 있는 곳으로 다시 향했습니다.




맥주 한 잔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루 동안 스쳐간 소중한 생각과 감정이 거꾸로 흘렀습니다. 순간순간 되새겨보면 하나같이 모두 행복하고 안전하며 완벽합니다. 이 모든 상황이 제 앞에 나타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제가 삶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통과하기 때문입니다.



* 어쩌다 보니 특정국가 제품과 가게를 많이 다뤘습니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 표지 : 공덕 근처 시나몬롤이 맛있던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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