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남세아 Aug 26. 2024

하루키가 나에게 건넨 편지


빡빡하게 채워진 일정에서 한두 시간만이라도 할애하여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처음에는  욕심 없었는데, 숙소를 신바시에서 오츠카로 바꾸면서 마음이 동요했다. 아마도 지난 도쿄 여행 때 들르지 못했던 아쉬움이 남았기 때문일 모른다. 더구나 전차(탱크 아님)까지 탈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가슴은 더욱 콩닥거렸다.


틈틈이 관련 정보를 끌어모았고 숙소부터 목적지까지 이동로와 전차 배차 시간을 따졌다. 역에서부터 도보로 접근하는 최단거리를 확인하려고 거리뷰도 여러 번 훑었다. 수요일이 휴무일이기 때문에 우리 일정과 무관한 점과 정오 어간에 방문할 계획이라서 주변 식당이 군집한 곳도 알아봤다.


오츠카 숙소 주변도 샅샅이 뒤졌다. 함께 갈만 한 온천, 식당, 책방도 검색했다. 나를 끌어당기고 콩닥거림이 큰 장소를 만나기 위해서 며칠을 집중했다. 열심히 검색한 끝에 전차 이동로 일대 온천을 발견했, 숙소에서 가까운 삼각김밥집과 선술집 곳도 마음에 담았다. 목표를 정하고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여 방책을 고안하는 군대의 계획수립절차를 그대로 적용한 다.


그렇게 작전명 오츠카는 치밀하게 계획했고 모든 게 완벽하게 진행될 줄 알았다.




2차 세계대전 연합군 최고사령관 아이젠하워는 "전쟁에서 작전계획은 무용하다"라고 말했다.(물론 계획수립은 무용하지만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논조이다) 아이젠하워 말처럼 오츠카작전을 위해 세운 계획은 모두 흐트러졌다. 첫 번째 무너진 것은 오츠카 명물 봉고 오니기리였다. 1톤 트럭 삼각김밥집 이름을 가진 식당은 오츠카역에 도착하자마자 눈앞에 나타났다. 작은 구멍가게임에도 불구하고 가게 주변을 둘러싼 수십 명 인파 속에서 여유롭게 우리를 맞이했다.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가게 숙소 바로 옆이라서 다음날 아침 대기줄을 확인하며 방문해도 무방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말씀을 되새기며 가벼운 마음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다음 날 아침에 수정한 계획대로 가게를 일찍 찾아갔다. 오픈 30분 전까지 대기줄이 없어서 눈치싸움에 승리한 기분이 들어 들뜬 채 한적한 가게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 앞에는 아담한 팻말 하나가 나를 노려봤다. 도쿄사람에게 오츠카 명물을 물어보면 누구나 '봉고 오니기리'라고 대답하게 만든 당당한 구멍가게는 휴무일 간판을 건방지게 선사했다. 결국 오니기리는 어디를 가도 맛있다고 합리화하며 발길돌렸다.


다음은 온천과 이자카야가 무너졌다. 신주쿠, 시부야, 나카메구로를 하루 일정에 넣고 순삭 하려는 초단타 계획을 세울 때부터 무리였다. 시부야에서 늘어져 낮잠을 주무신 둘째(감기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음)가 큰 역할을 했지만, 가챠와 인형 뽑기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린 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덕분에 소중한 두 시간과 오천 엔을 허비했고 다시는 유혹에 빠지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얻었다. 늦은 시간 숙소로 복귀했고 객실 욕조가 온천을 대신했다. 따뜻한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몸을 담그며 일본 수돗물은 유황냄새가 나고 호시노계열 호텔이라 수질이 좋다며 합리화했다.


이자카야는 산토리 프리미엄몰츠 캔맥주와 말린 귤이 대신했다. 동네 작은 이온몰에서 세븐일레븐보다 무려 30엔(270원)이나 싸게 구입한 맥주는 나마비루(생맥주)를 잠시 잊게 했다. 환율 덕분에 우리나라 다이소보다 200원 정도 싼 말린 귤도 출생지가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다미 바닥에서 널브러뜨리고 즐겼때문에 느낌이 달랐다.


무엇보다도 우리 감성을 북돋고 새로운 영감을 잔뜩 심어줄 '도덴 아라카와선' 전차 타기와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 방문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도서관이 있는 와세다대학교로 이동하기 위해서 가까운 전차역으로 이동했다. 숙소에서 3분 거리를 이동하는 중에 전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고 건물 사이에서 스러운 복고형 전차가 역에 들어서는 모습을 목도하자 가슴이 콩닥거렸다. 운 좋게 타고 싶은 전차가 나타난 것이다.


전차에 올라타서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출발을 알리는 종소리와 차장 안내멘트가 겹치며 전차는 서서히 움직였다. 앞창에서지상으로 뻗은 선로가 다가왔옆창에서 건널목 여러 개가 옆으로 지나갔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고대했던 전차 여정을 만끽했다.


복고를 그리 좋아하는 건 아닌데, 언제부터인지 유독 전차를 보면 흥분한다. 아내와 함께한 시간 속에 여러 전차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 홋카이도를 처음 갔을 때 함박눈을 맞으며 탔던 삿포로 전차, 하코다테에서 하루종일 즐겼던 전차, 짬뽕과 카스텔라로 반겨준 나가사키 전차, 육갑산을 오르던 산악전차, 아침을 사려고 나섰던 구마모토 전차까지 우리가 함께 했던 행복한 추억은 전차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이번 오츠카에서는 두 딸과 함께  전차가 남았다. 행복한 전차 여행은 8월 초 한여름 더위와 습기도 나를 불쾌하게 만들 수 없었다. 여행 사진을 다시 꺼내 보니 전차 옆에서 행복해하는 내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마지막은 '무라카미 하루키'도서관이다. 전차 종착역인 와세다역에 내려 기념사진을 여러 장 찍고 5분 거리인 와세다 대학으로 향했다. 후문이 개방되지 않았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열려있었다. 후문을 통과해서 오래된 대학 건물 사이를 거닐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와세다 대학생이 된 듯했다. 스무 해나 지났지만 캠퍼스 낭만도 떠올랐다. 건물 창문과 유리문 안으로 보이는 교실로 불쑥 들어가싶은 욕구도 샘솟았다.


학교에 들어선 지 5만에 도서관 근처에 다다랐다. 지도를 보니 자연대처럼 생긴 건물만 돌아가면 도서관이었다. 돌아가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서 건물 중앙에 난 공간으로 통과했다. 뒤에서 따라오는 아내와 딸을 뒤로하혼자서 치고 나갔다. 자연대처럼 생긴 건물 끄트머리를 돌아서자 하얀색 도서관 건물이 나타났다. 투박한 외형이었다. 하지만, 입구에 보이는 철체 조형물은 나에게 빨리 달려오라고 소리치는 외계어처럼 보였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어느새 도서관 현관 앞에 도착했고, 문 안쪽 어둑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감성보다는 이성이 앞서고 정확한 판단과 분석을 통해 빠르게 상황을 이해하려는 두뇌와 대수롭지 않음과 부질없음으로 포장한 심장이 동시에 작동했다. 반응하는데 3초도 걸리지 않았다. 뒤따라 오던 아내와 두 딸이 자연대 같이 생긴 건물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늠할 수 다. 모든 게 멈춘 듯했고 나만 쏜살같이 움직였다.


어느새 몸은 도서관 정문으로 향했다. 아담한 하루키 도서관 건물을 옆에 끼고 어둑한 내부를 외면하며 오늘은 휴무일이 아닌 토요일이라고 읊조렸다. 찰나에 정문 앞에 도착했다. 옆문에서 볼 때보다 어둑한 실내가 환하게 나를 맞이했다.


친절한 하루키는 달력 같은 편지도 한 장 남겼다. 달력에는 아라비아 숫자와 일본어 그리고 영어가 혼재되어 있었다. 하얀색 영어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집 막내도 알만한 단어였다. 그러나 계속 읽었지만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뒤 아내와 두 딸이 도착했다. 큰딸이 배고프다고 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고 다시 아빠로 돌아와서 대학 근처 식당이 모여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8월 한 여름 도쿄 무더위에 학생과 교직원은 쉬어야 한다. 그래서 방학이 있다. 일본 고유문화인지 일본 잔재인지 잘 모르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 두 딸도 방학이다. 8월은 대부분 여름방학이다. 대학교내 도서관이니 휴관도 당연하다. 그렇게 방학을 좋아했는데, 방학 없이 스무 해를 넘게 살았더니 까맣게 잊고 지냈다. 큰딸이 먹고 싶다는 삼각김밥을 사러 편의점을 찾으며, 도쿄 와세다대학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을 봤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게 좋았다고 합리화했다.


그렇게 오츠카 작전계획은 하루키 편지 한 장을 전유물로 남긴 채 사라졌다.




* 오츠카 작전계획은 사라졌지만 사진은 남았네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