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1호선을 타고 인천에서 서울로 가다 보면 나에게만 어색한 풍경이 눈에 자꾸 들어온다. 어려서부터 엄마 손을 꼭 잡고 동대문으로 커튼을 사기 위해 전철을 많이 탔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다 보니 앉지 못하고 출입문 근처에 자리를 잡는 경우가 많았다. 답답한 전철 안쪽보다 창밖을 보면서 나보다 뒤처지는 풍경을 보는 게 좋았다. 전철 안은 숨 막힐 정도로 좁고 답답했지만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사람과 건물 그리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지평선까지 푸르게 보였던 너른 밭이 그림같이 펼쳐지면서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요즘 지하철 1호선 노선 중에 논이나 밭을 볼 수 있는 구간은 거의 없다. 도시가 발달했고 더 발달한 도심지는 전철이 지하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급행과 더급행이 생기면서 창밖 풍경도 빠르게 뒤쳐지는 사람과 건물을 쫓아가려면 눈만 아파온다. 눈이 편한 푸른색보다는 다루기 편한 회색과 흰색, 검은색으로 앞이 가려진다. 이제는 창밖을 보는 것보다 책을 읽거나 스마트폰을 보는 게 편하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도 스마트 폰만 보고 있기 때문에 굳이 나만 틀린 그림이 될 필요는 없다.
동암역에서 전철을 타고 십여 분 정도 지나면 부평역에 이르는데, 부평역부터 부천역까지 가는 동안 비슷한 풍경이 이어진다. 작은 키 내 눈높이에는 지평선 끝나는 먼 곳까지 푸른 밭 풍경이 계속된다. 주변을 둘러봐도 온통 초록 빛깔만 가득하다. 전철이 송내역에 멈추고 출입문이 열리면 안전하게 탑승하라는 객장의 안내와 밀어붙이는 사람들보다 싱그러운 풀내음과 포도향이 내 콧속으로 먼저 들어왔다. 송내역 주변은 온통 포도밭이었다. 전철역을 포도밭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내 기억 속에 송내역은 포도역으로 남아있다. 어린이집 소풍을 송내역 포도밭으로 다녀온 기억도 생생하다. 지금은 포도 한 송이도 볼 수 없이 어색한 풍경만 남았는데, 역 근처에 회색 빛깔 포도마을 아파트를 보면서 아쉬움이 더해진다.
어렸을 때 먹던 포도는 캠밸이었다. 마흔이 넘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고, 당시에는 그냥 포도와 청포도만 존재했다. 엄마가 그냥 포도를 사 오게 되면 누나보다 많이 먹기 위해서 양손으로 포도 알맹이를 하나씩 집었다. 하나를 입에 넣고 두세 번 우걱거리며 입안에서 껍질과 알맹이를 분리한다. 껍질은 좌우 볼 속에 남겨놓고 속 알맹이만 그대로 삼킨다. 내 입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서 대기 중이던 다른 손에 들린 포도 알맹이가 임무교대를 한다. 교대한 포도 역시 반복동작을 하고 알맹이는 내 목구멍으로 들어가고 껍질은 방금전에 남겨진 다른 껍질과 함께 포개지면서 입속에서 잘근잘근 씹힌다. 매번 포도를 씨까지 먹는다고 야단 맞았다. 심지어는 씹던 껍질도 삼킨적이 많아서 엄마는 배탈날까봐 걱정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배고프던 시절 포도를 조금 더 먹기 위함이라는 슬픈 현실이 싫어서 껍질을 씹어 먹으면 껍질 안쪽에 붙어있는 달콤함과 껍질의 쌉쌀함이 오묘하게 전달되기 때문인 것으로 포장했다. 하지만 엄마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는 거봉을 좋아했다. 비싸서 일 년에 한 번을 먹기도 힘들었는데, 씨까지 먹는 나를 위해서 돈이 생기면 가끔 사다 먹였다. 엄마가 거봉을 먹을 때 표정을 보면,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거봉의 대부분은 내 입속으로 들어갔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거봉을 먹으면, 어머니는 나에게 양보한다. 한두 알 드실 때 당신의 미소와 올라가는 입가는 여전한데, 아직도 내가 모르는 줄 안다. 아무리 거봉을 사다 드려도 다시 내어 주신다. 아내도 내가 거봉을 좋아하는 줄 알고있다. 정말로 내가 거봉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만나는 포도는 점점 변해갔다. 이제는 거봉도 아니고 쉬라즈나 멜롯을 좋아한다. 어이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나지도 않고 먹지도 못하는 포도를 좋아한다. 우리와 다른 환경에서 자란 포도를 이용해 만든 신의 물방울을 다른 음식과 곁들이는 게 좋아졌다. 포도밭이 아파트로 변해있듯이 내 취향도 변했나 보다. 그렇다고 포도를 안 먹는 것은 아니다. 가끔 식당에서 나오는 디저트나 뷔페에 가면 세네 개 알맹이가 붙어 있는 포도를 먹는다. 아니면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서 이제는 익숙해진 샤인 머스켓을 별다방에서 사서 음료로 먹는다. 정말 맛있는데, 그래도 가끔 캠벨이 생각난다.
포도는 오랜 친구처럼 어쩌다 한 번씩 나에게 다가오는데, 예전 모습과 조금은 달라져서 아쉽다. 하지만, 거봉이나 샤인 머스켓으로 오거나 쉬라즈나 멜롯으로 변해 있어도 시큼하면서 달달한 맛은 그대로 머금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껍질까지 먹던 그 맛이 와인에도 그대로 실려 있기 때문에 아쉬움이 조금은 달래 진다. 다만, 회색 빛깔 아파트가 푸른 포도밭을 대신할 수는 없기에 포도밭 가득한 토스카나로 떠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