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용 설명서 (7)
어떻게 행복을 이룰 수 있는가?
몸과 마음의 평온함을 이루면 된다고 에피쿠로스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몸과 마음의 평온함을 이룰 수 있는가?
일단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 제거되면, 육체적인 쾌락은 증가하지 않고, 단지 형태만 바뀐다.
반면에 정신적인 쾌락은 우리 지성이 쾌락과 정신에 가장 큰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했을 때 그 한계에 도달한다.
“육체적인 쾌락”은 (본성적인 욕망이 충족되지 않은) 결핍으로 인한 모든 고통이 제거되면 극대화되는데, 이것을 ‘아포니아’(ἀπονία, 고통의 부재)라고 한다.
정신적인 쾌락은 지성에 따른 바른 지식을 통해 쾌락의 한계를 알고, 모든 두려움이 제거되었을 때 극대화되는데, 이것을 ‘아타락시아’(αταραξία, 마음 소란의 부재, “평정심”)라고 한다.
6장 주요 가르침들 18번과 주석 210번
먼저,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 제거된 상황을 만든다.
그리고 우리 지성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의 정체를 이해하고 두려움을 없애는 것으로 아타락시아에 다다른다.
이 두 가지가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의 정의이다.
에피쿠로스는 아타락시아에 다다르는 세 가지 특질을 [사려 깊음], [아름다움], [정의로움]으로 정의하며
쾌락의 삶은 미덕의 삶과 관련이 깊다고 한다.
사려 깊음의 정의를 책에서는 이렇게 소개한다.
‘프로네시스’(φρόνησις)는 어떤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요모조모를 따져 옳고 그름을 분별해 내는 것을 가리킨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진정한 쾌락들을 선택하고 고통을 회피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쾌락과 고통의 많고 적음을 면밀하게 계산해 바른 판단을 하는 능력이 필요하고, 이 능력이 바로 ‘프로네시스’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지혜를 두 종류로 나누어 사변적 지혜를 ‘소피아’(σοφία)라고 했고, 실천적 지혜를 ‘프로네시스’라고 했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철학에서 사변적 지혜가 아니라 실제로 쾌락과 고통을 판별해 내는 실천적 지혜가 훨씬 더 중요했으므로, ‘프로네시스’가 “지혜를 사랑하는 것”(φιλοσοφία, ‘필로소피아’)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에피쿠로스에게는 “지혜(‘소피아’)를 사랑하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 ‘프로네시스’를 따라 쾌락과 고통을 분별해 내는 것이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5장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낸 서신 주석 188번
책에서는 “아름다움”은 모든 미덕을 갖춘 삶을 가리키고, “정의로움”은 본성과 일치하는 삶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주석 200번)
즉, 미덕을 갖추고 본성에 일치하는 삶 안에서 진정한 쾌락을 선택하고 고통을 회피할 분별력과 실천적 지혜를 갖추면 아타락시아에 다다르는 것이다.
왜 나는 에피쿠로스 쾌락을 읽어보려 했을까.
이는 한 가지 물음에서 시작했었다.
한 달 전의 나는 내가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자유롭지 않아 여행을 가보고 싶었다. 내가 익숙했던 그 장소와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장소.
그저 자유롭게 어디로든 다니면 그 자유라는 것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생각보다 자유로움을 실감하지 못하였다.
그때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가방에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보며 연상한 것이기도 한데..
[개인의 관점에서 자유로운 상태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이러한 물음에 자유론은 적절한 책이 아니다. 자유론은 사회의 관점에서 자유를 이야기했기에.
4주 전 이러한 글을 올렸었다.
아마 2번과 3번의 질문의 답을 이 책이 해준 것 같기도 하다.
이 글에서 여러 질문을 했었다. 가설 하나를 만들었었는데
자유와 소유는 반비례한다.
라는 가설 하나를 세웠다. 그러나 하나의 질문으로 이 가설을 반박하였는데 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욕심을 충족하는 것은 자유에 해당하는가?
욕심을 충족하는 것은 결국 첫 문장의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되겠다.
그러나 과연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지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내가 꼭 해결해야 할 욕심인지, 내려놓을 수 있는 욕심인지, 어쩌면 내려놓아야 할 욕심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그 당시 결론 중 하나로 이렇게 말을 했었다.
결국 내 욕심이 정말 내게서 나온 욕심인가. 내가 해결해야 할 욕심인가. 내려놓을 욕심인가.
이러한 고민이 더욱 자유로운 인간을 만들 것이다. 이게 결론이 될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 에피쿠로스는 사려 깊은 상태가 바로 이러한 고민을 하는 상태라고 말하는 듯하다.
진정한 쾌락들을 선택하고 고통을 회피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쾌락과 고통의 많고 적음을 면밀하게 계산해 바른 판단을 하는 능력이 필요하고, 이 능력이 바로 ‘프로네시스’다.
어쩌면 내 결론이 그럴듯하다는 말을 고대의 철학자가 이야기해 준 것 같아 기쁘다.
이제 아타락시아에 도달하기 위해 없애야 할 두려움을 적어보겠다.
그 두려움은 두 가지로, 세상과 죽음의 무지에서 비롯한 불안, 그리고 한정된 삶에서 주변 사람들에 의해 발생하는 불안이다.
전자의 두려움은 철학을 하며 세상과 죽음을 이해하는 것으로 해소할 수 있다.
그리고 후자의 두려움은 사람들과의 우정으로 해소할 수 있다.
즉, 세상을 공부하고 주변인들과의 우정을 쌓아나가는 삶이 마음의 평온함에 다다르게 하고 결국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이 지금 나의 삶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지만 내 욕심을 더욱 면밀하게 볼 수 있는 힘을 가져다줄 것 같은 책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정을 위해서라도 사회 관점의 자유로움도 추가로 공부할 만하다는 것을 느꼈다.
주변 사람들에 의해 발생하는 불안은 주변인의 평정심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1. 개인에게 자유로운 상태란 무엇인가?
2. 내 욕심 중 채워야 할 것과 채우지 않아도 될 것, 채우지 않아야 할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3. 에피쿠로스는 고통을 해소하는 것 이상의 쾌락은 불편함을 가져다준다고 하였는데, 항상 그러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러한가?
와.. 정말 좋은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행복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어쩌면 제가 책을 읽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도 있었겠군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뚜렷한 답이 없으시면 바로 읽으시면 되는 책입니다. 천체와 자연에 대해 논증하는 부분은 철학의 다른 영역이므로 궁금하시면 참고하시고 아니시라면 뛰어넘어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에피쿠로스에게 그에 대한 논증은 중요했던 것이, 세상과 죽음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면 그로부터 두려움이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의 발전 덕에 이러한 두려움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을 것입니다.
이 책을 읽는다 해서 바로 자족하는 삶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적어도 욕심에 대한 분별력이 필요함을 다시 강조하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