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점점

약속

59화

by Lia

대학 시절 언젠가 아직 당선되지도 않은 등단 소감문을 쓴 적이 있었다. 실제도 아닌데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던지, 나는 등단을 한다는 상상에 푹 빠져서 며칠이나 이미 등단한 기분으로 살았다. 그리고 어느 날 새벽에 노트북을 켜서 첫 문장을 적었다. 지나치게 감사하며 겸손을 떨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자신감에 넘치거나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문장이어서는 안됐다. 고민 끝에 만든 첫 문장은 이랬다.


지키지 못한 약속들이 떠오른다.


며칠동안 내가 등단을 한다면, 이라는 가정을 하고 살아보았더니 처음엔 설레고 기쁘고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조금씩 지나자 나는 그 상황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내가 등단을 하면 하겠다고 한 사소한 약속들이, 까맣게 잊어버릴만큼 작고 연약한 약속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친구나 선생님에게 '내가 등단하면 등단소감에 감사한 이름 적을 때 당신의 이름도 넣겠다'는 약속. 내가 지나가듯 다짐했던 '내가 등단만 하면 내 소설 형편없다고 했던 사람들에게 웃으면서 인사하겠다'며 분노했던 것. 그런 것들이었다.


옹졸하고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던 그 모든 약속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나의 연약함을 다시 깨달아버렸다. 나는 등단소감문을 완성하지 못했다. 쓰면서 그 약속을 하나하나 떠올리니까, 감사할 사람에겐 등단을 하지 않아도 감사했고, 미운 사람은 등단을 못해도 미웠다. 결국 등단을 하고 말고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이미 등단을 해봤다. 내 마음은 등단을 해 봤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약속들이었다. 내가 했던 약속들. 지키지 못한 혹은 못할 약속들. 나는 그 날 밤 그 많은 약속을 다 취소하고 하나의 약속을 남겼다. 앞으로는 함부로 약속하지 않겠다는 약속.


하지만 여전히 나는 많은 약속을 하며 산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약속들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어느 날 밤 문득 수많은 지키지 못한 약속이 떠올라서, 한참동안 멍하니 나의 무력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다.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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