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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a Sep 30. 2017

커피를 마셨다 1

64화

나는 과정에 대해 생각했다.


지난 주에 물컵을 하나 샀다. 펜언니는 물컵에 애정이 많은 편이라 텀블러나 물병코너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데,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애초에 물건 욕심도 거의 없지만, 물도 잘 마시지 않아서인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내가 물건의 '기능성'에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기능이 뛰어난 물건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다. 컵이란 건 그냥 물을 병째로 마실 수 없어 잠시 옮겨담는 정도의 기능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도 이 물컵을 산 이유는 그 날 무언가가 사고 싶었고, 마침 가격도 쌌기 때문일 것이다(펜언니가 기뻐하며 사주었다). 그러나 이 컵에는 굉장히 놀라운 기능이 몇 개 있었는데, 하나는 넘어지지 않도록 바닥에 실리콘이 있어 고양이가 치거나 실수로 툭 건드려도 절대 쏟아지지 않는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보온과 보냉기능이 매우 뛰어나다는 점이다. 솔직히 살 때는 관심이 없어서 거의 몰랐다(알았는지 몰랐는지 모르겠다).


그건 내가 예쁜 컵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을 때 일어난 일이다. 커피는 무섭도록 뜨거웠지만, 컵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차갑다고도 따뜻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온도가 없는 감촉이었다. 나에게 뜨거운 커피란 아주 중요하다. 아니, 음식의 온도란 매우 중요하다. 모든 음식은 갓 요리되었을 때의 온도에서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 커피를 마셨을 때 나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 느낌은 뭐랄까, 쓸쓸하고도 슬펐다. 이상하다. 커피는 매우 뜨거웠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과정에 대해 생각했다.


커피가 맛있기 위해서는 커피의 향과 맛, 커피의 온도, 커피를 담는 컵, 커피를 마시는 공간, 함께 마시는 이, 마시고 있는 시각, 마시기 전에 먹었던 음식, 마신 후의 일정같은 게 다 중요하다. 그리고 내가 컵을 감싸쥐었을 때, 나의 손끝이 뜨거운 커피를 만지는 것도 아주 중요했다. 이 컵은 훌륭한 컵이지만, 음료를 마시는 것에만 집중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음료가 함부로 쏟아지지 않도록. 음료가 오랫동안 제 온도를 유지하도록. 음료에 먼지가 들어가지 못하게 보안이 철저한 뚜껑과 컵 표면이 늘 붙잡기 좋도록 만들어졌다. 컵이 진화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컵이다.


그러나 음료만큼 중요한 건 내가 그 음료를 경험하는 과정이다. 내가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내 몸을 따뜻하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고, 그건 내 주변의 온도나 내 마음만큼 따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뜨거운 커피를 마시려면 뜨거운 컵이 있어야 되는 거다. 필수다.


이어서 나는 우리 서점에서 책을 사는 사람들의 수고로움을 생각했다. 책을 주문하여 사러오는 분들이 많은데, 그들에게는 앉아서 원하는 책을 싼 가격에 사면 그 책을 가져다주는 온라인 서점들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 서점까지 책을 주문하러 오고, 나와 시간을 맞추어 책을 찾으러 오는 시간과 발걸음과 주고 받는 연락을 생각했다. 책 그 자체를 읽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책을 읽는 데에 수반되는 경험이 없다면, 그것은 내가 뜨거운 컵을 만지지 못하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편리하지만 쓸쓸한 일이다. 책을 사기위해 책을 사러 갈 필요가 없다는 건. (그리고 나는 이 문장에 어울리는 서술어를 생각하지 않는다)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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