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점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a Mar 09. 2018

내 친구는 어디로 떠났을까

69화 선물 이벤트 특집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여행의 즐거움을 가르쳐주려면 극적인 여행 이야기나 화려한 사진으로는 부족하다. 특히 목적이 여행을 가게 하려는 거라면 턱없이 부족하다. 왜냐면 나는 여행 에세이도 좋아하고 여행 사진집도 좋아하고 여행담 듣는 것도 즐거워하고 맞장구도 잘 치지만, 여행은 안 좋아하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는 일상을 지키는 일이 소중하고 즐거워서, 여행을 떠나는 발길이 안 떨어진다. 무엇을 바라고 떠나느냐. 그게 어려운 것이다. 무엇을 보러 가는 걸까. 어떤 것을 느끼려고 가는 걸까. 혹은 무언가를 얻으려고 가는 걸까. 떠난 그 곳에서 뭘 기대하는지. 나에겐 그게 없다. 오히려 그 곳에서 필연적으로 느껴야 할 그리움, 허무감, 아쉬움 같은 것들이 두렵다. 나에게 여행은 떠나는 게 아니라 돌아오는 것에 더 가깝다.


그런 내가 얼마 전에 비행기를 무려 10시간 이상 타고 지구 반대편에 다녀왔다. 이제부터 나오는 이 지역에 관한 힌트를 통해, 이 지역이 어디인지 추측하시는 구독자님께 소소한 선물을 보내드리려고 한다. 아마도 책과 엽서와 등등 귀엽고 어느 정도는 쓸모가 있는 그런 꾸러미가 될 것 같다. 수신자 선정 기준은, 이 지역이 어디인지 알아맞추는 게 아니라 나름의 근거로 추측 하는 거다. 실제 어느 지역인지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기억이나 상상을 동원해서 어디일 것 같다고, 이유와 함께 써주시면 된다.


아무튼, 나는 여행을 갔다. 너무 긴 비행시간에 지쳐서인지, 혹은 내가 워낙 기대치가 낮아서인지 임팩트 있는 첫인상을 남기지 않았다. 나는 마치 두 세 번 정도 걸어 본 동네를 걷듯이 길을 걸어다녔다. 그도 그럴 것이 매체에 의해 많이 소비된 거리이긴 했다. 그 곳은 전혀 낯선 곳이 아니었다. 낯선 건 어디서 자주 보던 그 곳에 온 나 자신이었다. 넘나 이상한 기분.. 어쩌면 그게 진짜 여행인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새로운 걸 보기 위함이 아니라, 매일 보던 그림이나 사진 속으로 들어가는 것. 이전에 가 본 다른 관광지가 더 볼 것이 많았고, 여긴 별로 볼 게 없네... 싶으면서도 제일 열심히 눈을 굴려가며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멀리서도 보이는 건물이나 관광 명소가 아니라 자세히 봐야 보이는 것들을 열심히 봤다.


비둘기가 예뻤다. 진짜 이상한 동네인 것이다. 서울은 비둘기가 본래의 깃털색보다 언제나 더 검고, 살이 좀 쪘고, 지저귀는 일도 별로 없는데, 그 동네 비둘기들은 깃털마다 색깔이 다르면 그 다른 무늬까지도 다 보일 정도로 깨끗하고, 그린 듯한 매끄러운 실루엣에, 걷기보다 많이 날아다녔다. 그 모습이 많이 낯설어서 꽤 자주 주의깊게 봤다.


사람들이 반응을 잘했다. 나는 내 기분이 많이 드러나는 편인데, 낯선 사람에게도 매한가지다. 편의점에 주스를 사러 가도, 기분이 좋으면 '오예! 맛있겠다! 빨리 마시고 싶어!' 하는 기분을 표현하고, 기분이 나쁘면 '이거라도 마시지 않으면 난 오늘 행복한 일이 하나도 없어' 하는 기분을 표현한다. 그냥 표정이나 행동으로 하는 소극적인 표현이 아니라, 기분이 좋을 땐 "하하! 안녕하세요! 이거요! 맛있겠다! 음~ 안녕히 계세요~" 이러면서 사고, 기분이 안 좋을 땐 주스를 올려놓고 시무룩하게 "(기분 나쁜 이유 생각 하느라 가격 못 듣는 일이 많음) 얼마라고요? 아 네. (영수증...) 아니오. 안녕히 계세요." 하고 말한다. 별로 의도적인 게 아니라서 상대방의 반응은 잘 눈치채지 못했었는데, 여행지에서 만난 편의점/상점 점원들은 굉장히 반응이 컸다. 대체로 여행지에서는 늘 신나고 기분이 좋으니까 전자의 모습으로 '으악! 이걸 사버렸어! 빨리 호텔 가서 뜯어볼거야! 너무 기분이 좋군! 이걸 팔고 있어주어서 정말 고마워!' 하는 느낌이었는데, 점원들이 나에게 매우 기분 좋은 웃음을 보여주었다. 키득거리며 웃거나, 여기 여행 왔느냐고 묻거나, 옆에 있는 기념품이 공짜이니 챙기고 싶으면 가져가라고 하거나, 하는 식이었다. 나에게는 신기한 일이었다. 서울에서는 내가 아무리 과하게 표현해도, 같은 표정과 같은 뉘앙스로 날 대했는데 말이다. (물론 기분이 나쁠 때에 올 수 있는 반응이란 없지만.)


사람들이 엄청 쿨했다. 쿨하다는 건 멋지다거나 시크하다기보다는 무심해보였다. 무심하니 남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내 일만 생각하기에도 벅차 보이는 걸음걸이였다. 그토록 삶이 복잡하고 생각이 많아 보이는 사람들은 처음 봤다. 뭐, 내 착각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산책을 하는 사람도 쇼핑을 하는 사람도, 마음 속 어딘가는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바빴다.


나에게 익숙한, 낯설지 않은 이야기들이 들렸다. 이건 내 편견일 수도 있겠다. 이야기들이란 건 이런 거다. 아침 시간에 공원 앞 도넛 가게의 문 앞에 서서 손님들에게 문을 열어주고 아침인사를 건네는 노숙자 아저씨가, 그의 이야기가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빛나는 명품 가게 앞을 지나가는 키가 크고 날씬한 금발 여자의 얼굴에 묻어나는 자신감과 모멸감. 그냥 모든 사람들이 다 나와 비슷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친숙함이 나쁘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가 속속들이 궁금하면서도, 그들이 끝끝내 말해주지 않더라도 상관없을, 좋은 느낌이었다. 좋은 느낌이 든 이유는, 모두가 이 곳을 갈망하고 마치 이 장소에 자유로워지는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행을 다녀온 후에 나는 정확하게 깨달았다. 내가 사는 곳은 나를 바꾸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사는 곳에 마법을 걸 수 있다. 아니지, 나만이.


당신이 생각하는 나의 여행지는 어딜까. 나는 어디를 여행하고 온 것일까. 하지만 아무도 댓글을 남기지 않으면 어쩌지?





점점.

매거진의 이전글 달리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