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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a Apr 21. 2018

잘 지내는가, 하는 문제

71화

내가 어렸을 때 미술을 싫어했던 이유를 알았다. 나는 내가 선택한 색깔이 마음에 들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 '마음에 들지 않는 선택을 자꾸 해야하는 일'이 싫었다. 나는 여전히 그런 일을 싫어한다.


그러면 어린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생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선택을 자꾸 하면서 마음에 드는 선택지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혹은 마음에 썩 들지는 않지만 고만고만한 선택지가 있는 곳으로 가거나. 나는 선택의 여지 없이 후자의 인생을 살아왔다. 첫 번째 선택지를 골랐다면 언젠가는 마음에 썩 드는 선택지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게 참 아쉽다. 그래도 두번째 선택지에는 되게 고만고만하게 마음에 드는 선택지들이 많았다.


최근에 방탄소년단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분명 첫 번째를 선택한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내가 그들의 노래를 들을 때 그런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몇 노래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게 쉽게 한 선택처럼 보이진 않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들인 실패같다는 느낌이다. 그게 내가 아이돌에게 바랄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음악이 아닐까 싶었다. 이게 꼰대식으로 말하자면 노오력인가... 최선을 다한 실패. 그건 이미 실패가 아니다. 그들이 노래를 통해 반복해서 하는 메세지이기도 한데.


그렇기 때문에 방탄소년단의 노래에는 로맨틱한 게 뚝뚝 묻어난다. 팬들을 향한 사랑에 진심이 잘 담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들이 열심히 실패한 이상, 팬들은 그들의 실패를 사랑해 준 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최대한으로 열심히 했는데 망한 것 같은 걸 좋아해주면 진심으로 고마울 따름일 테니까. 만일 그들이 한 게 어쩌다 나온 성공이거나, 피땀흘려 일군 성공이라면 팬이라는 존재가 떠날까봐 두려운 존재가 될 것이다. 제일 신기한 건 그걸 성공 혹은 실패로 판단하는 게 그들 자신들이라는 점이다. 지금이야 방탄소년단은 성공의 아이콘이지만, 아마 그들 스스로는 성공이 아니라 그냥 결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노력에 대한 결과. 그건 성공이라는 반짝거리는 상패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약간 유치하게 들리겠지만, 그래서인지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인생을 살면서 별로 생각해보지 않은 첫번째 선택지에 눈을 뜬 것 같다. 물론 청소년기엔 혈기가 왕성해서 실패를 하겠다는 둥 도전을 하지 않으면 성공도 없다는 둥 형편없는 명언집같은 소리를 하며 학교도 그만두고 어쩌고 했지만, 천성이 연약한 존재라 마음에 들지 않는 선택을 반복하는 게 너무 어려웠는데, 마음에 안 드는 춤이라도 자꾸 추면서 내가 생각하는대로 내 몸이 움직일때까지 하는 게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걸 깨닫는 것 같다. 아직도 어려워서 늘 내가 잘 할 수 있는 고만고만하지만 마음에 완전히 들지는 않는 선택지들에 기웃거리기는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웹툰 작가의 인터뷰를 읽었는데(이거에 대해선 나중에 쓸 기회가 있겠지), 그가 이런 말을 했더라. 제대로 안 읽었지만 대충 자기는 만화 작가로 잘 지낸다는 소리였다. 맥락은 좀 더 복잡했다. 그 말이, 너는 너로 잘 지내냐는 질문으로 보여서 얼른 하던 걸 다 멈췄다. 나는 나로 잘 지내고 있지 않다고 대답해야하는 거. 너무너무너무, 다니기 싫은 학교 다닐 때 이후로 십년만에 느낀 기분이었다. 엄청 그리운 기분이다.


시간이 의미없이 하염없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것 같다가도, 이럴 때는 푸념이 무색하게 그 무게감이 느껴진다. 시간은 의미없이 흐르지 않았다. 의미를 만들면서 흘렀다. 내가 모를 때나 알 때나.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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