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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a May 08. 2018

변화

72화

오늘은 왠지 아주 서투른 글을 쓰고 싶다. 굉장히 엉성하고 군데군데 눈에 띄는 비문이 있고 내가 훗날 읽으며 정말 엉망진창이네, 라고 말할 만 한 글. 아무런 후가공이 없이 너무 직설적이고 단정적인 언어로 표현한 감정 때문에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글. 그런 무자비한 글을 쓰고 나혼자 잘썼다는 듯이 뿌듯해하며 웃던 시절이 있었다.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나는 생각했다. 오늘이 그 날일까? 가만히 꿈을 되새겨봤다. 잠에서 깨면 습관적으로 하는 의식 행위다. 꿈에서 나는 걷다가 어딘가에 부딛혔다. 그제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던 꿈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세요?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다시 걷기. 하염없이 걷다가 문득 어디로 가고 있더라, 생각해보니 나는 병원. 그렇지, 병원을 가고 있었지. 그런데 무슨 병원이더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더 이상 꿈의 뒷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이제 꿈은 잠시 접어두고, 오늘 할 일을 생각해본다.


오늘 나는 일어날 것이고, 일어나서 시계를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창가로 가서 날씨를 주의깊게 살펴본 다음, 원래 하려고 했던 일 중에 몇 가지를 뽑을 것이다. 만일 날씨가 흐리다면, 비가 오기 전까지 은행을 들러야 한다. 맑다면 천천히 아침을 차릴 것이다. 그리고 비가 온다면, 비가 온다면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한두시간 정도 서 있겠지. 아침 차려먹기. 은행. 하루와 산책. 돌아와서 화장실 청소. 저녁 차려먹기. 부모님이랑 레빈에게 안부전화. 오늘 만일 이걸 다 한다면 잠들 때 쯤엔 아마 녹초가 되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또다른 가능성을 점쳐봤다. 아무런 예고없이 일어났던 일. 그 일이 일어날 가능성. 그 날은 비가 왔다. 나는 눈을 떴다. 천장에 얇게 생긴 어두움과 빛의 기다란 선이 있었다. 선. 빛. 그늘. 그게 무엇인지 깨닫기까지 얼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던 걸까. 어쨌든 일어나서 시계를 확인했다. 늘상 깨어서 확인한 시간보다 삼십분 정도 늦은, 열한시 삼십분이었다. 나는 일어나서 발을 확인했다. 발. 발은 생각했던 것보다 납작했다. 바닥. 바닥은 여러 나무토막 그림이 이어져있었고 반짝거리는 부분도 있었다. 이렇게 생겼군. 나는 혼잣말을 처음으로, 다른 존재에게 말을 걸듯이 해봤다. 내 발에게 혹은 내 침대에게. 어쨌든 끝이 없는 어둠에 던지듯이 한 혼잣말은 아니었다.


그 날은 보였기 때문에, 다른 할 일은 아무것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계획 따위는 다 버려버리고 창가에 서서 그 모습을 보았다. 내가 늘 서 있던 그 창가. 손 내밀면 닿을 듯이 가까운 옆 건물의 외벽만 보였지만 그 곳에서 보이던 빗방울. 내려다보면 있는 좁은 골목과 쓰레기들. 비스듬히 보이는 골목의 끝에 이어진 큰 길가. 매일같이 저 큰길을 걸었다. 빗소리. 버스가 건물 틈새로 보이는 큰길을 지나가는 것. 나무.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 충분히 보면서 깨달았다. 드디어 지옥같은 삶이 끝나고, 나에게도 어련히 있었어야했던 공평함이 찾아왔다. 나는 이제 보인다.


거울을 보고 옷을 골라 입고 하루와 함께 산책을 다녀 온 후. 비는 여전히 흩날리듯 왔지만 내 생에 그렇게 맑은 날은 없었던 것을.


감사했지만 감사하다고 말하기엔 너무 늦은 게 아닌가, 그래도 언젠가는 오늘을 감사하다고 말하겠지. 밤이 늦도록 눈을 감지 못하고 보이는 모든 것을 한번씩 끌어안았다. 식탁에 앉은 채로 깜박 잠에 들었을 땐, 레빈이 놓고 간 그림을 껴안고 있었다. 그림은 여러가지 색깔을 사용해서 어떤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작은 집 같은 집이 있었고, 멀리 푸른 바다. 바다인지 아니면 그냥 바다처럼 만든 곳인지 모르지만.


그 다음 날은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 지독히도 평범한 날이었다. 나는 눈을 떴지만 그림은 보이지 않고, 흐릿한 불빛이 어른거렸다. 저녁이 되었을 땐 이미 어제의 화려한 창가 풍경따위 아쉽지도 않을만큼 다시 내 불행에 익숙해져있었다. 그것은 너무 아파서 때어내고 싶은 다리를 실제로 떼어낸 것처럼 허전한 고통이었다. 이젠 고통마저도 존재하지 않는구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 후로 세 번. 아침에 눈을 뜨면 천장에 빛과 그늘로 된 선이 보였다. 보였다가 다시 안 보였다. 때론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에 내 눈이 제 기능을 한다면,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무엇을? 다시 떼어내야 하는 다리 한 짝 말이다. 두 번 다시는 나에게 그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깨달은 후에 그러고도 몇 백시간의 어두움과 흐릿한 빛 속을 헤매고 나면, 나는 아침에 눈을 떴다.


문득 오늘일까, 오늘 내가 눈을 뜨면 천장에 비친 빛을 볼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그 답을 알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내가 기다리는 답은 그게 오늘인지 아닌지, 혹은 왜 그런 날이 있고 아닌 날이 있는지, 혹은 왜 나는 그런 날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인지. 이러한 세 종류의 답이 뻔한 질문과는 질이 달랐다.


이대로 눈을 뜨지 않은 채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흐릿한 불빛조차 보이지 않겠지만 괜찮다. 그렇게 눈을 뜨지 말까. 어쨌든 답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얼마 간 보낸 후. 나는 몸을 일으킨다. 지금 눈을 뜬다면 내 눈 앞에 보여야 하는 풍경을 마음 속으로 그리고, 다시 그리고, 색칠하고, 덧칠하고, 그 후에 눈을 떠 보자. 마음을 먹는다. 아직 눈을 다 뜨기 전에 한 번 더 다독여본다. 괜찮다고. 그리고 나는 눈을 뜬다.


나는 과연 이걸 기다렸는가? 만나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헛된 질문들이 허공에 날린다. 이것이 어쩌면 내가 원하던 일인가? 혹은 내가 간절히?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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