톤지루, 가볍게 만들어서 자주 먹자고

by 서모니카

‘심야식당’이라는 일본 요리 드라마 시즌 1의 첫 화를 처음 봤을 때, 내 눈과 마음을 홀리듯 사로잡은 메뉴가 있었다. 바로 톤지루. 각종 채소를 넣고 끓이는 돼지고기 된장국인데, 드라마 속 레시피에서는 ‘킥’으로 곤약이 들어간다. 그 곤약을 칼로 반듯하게 써는 게 아니라 손으로 뜯거나 숟가락으로 찢어서 넣어야 제맛이라고.


곤약이 들어간 된장국이라니, 맛이 상상이 안 됐다. 너무 궁금해서 바로 다음 날 톤지루를 따라 만들었다. 따로 레시피를 찾아보지 않아도, 드라마 속 조리 순서를 따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게 나름대로 ‘요리 드라마’라 레시피를 제법 상세히 알려주거든. 생각보다 만드는 법은 간단했지만, 맛은 깊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재현해낸 일본 가정식 스타일 국이었다.


그 시절 나는 아직 취업 전이라 용돈 받아가며 사는 처지였다. 일본 여행은 ‘취업 하면 가야지!’하는 언감생심인 이야기였는데, 톤지루 한 그릇만 있으면 잠깐 일본 여행이라도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재료도 본가에서 받아온 채소 몇 개랑 대패 삼겹살 조금이면 충분했고, 한국에서 흔히 먹을 수 없는 메뉴라 그런지 그 특별함은 두 배였다. 서울에 일본 음식점은 많지만, 의외로 이런 소박한 가정식을 파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갔다.


그 뒤로는 내 나름대로 레시피를 업그레이드했다. 대패 삼겹살 대신 두툼한 삼겹살을 넣어보고, 당근, 우엉, 버섯 같은 채소도 이것저것 바꿔 넣어봤다. 연근을 넣었더니 식감이 살아나서 더 맛있었다. 매번 재료를 달리하니 매번 새로운 맛이 나왔다.


취업하고 나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내 돈으로 일본 여행을 다닐 수 있게 됐다. 톤지루는 나에게 일본을 갈망하던 시절의 상징 같은 메뉴였지만, 막상 일본에 가서는 스시, 야키니쿠, 카이센동 같은 외식 메뉴에 더 눈이 갔다. 가정식을 파는 집을 찾기도 관광객에게는 꽤 어려웠고. 그래서 현지에서 톤지루를 맛보게 된 건 꽤 나중이었다.


어느 여행 중, 오사카 도부쓰엔 역 근처에서 길을 걷다가 우연히 아주 허름한 로컬 식당을 발견했다. 노부부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할아버지는 주문 받고 서빙하고, 할머니는 조리 담당.


마침 이른 점심 시간이라 배가 고팠던 나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다소 어둑하고, 테이블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메뉴판은 종이에 손으로 적은 것이었는데, 미소시루, 계란말이, 소시지 볶음, 채소 절임 같은 메뉴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마치 일본 할머니댁 부엌에서 먹을 법한 메뉴들이었다. 가격도 메뉴 하나 당 150~200엔으로 엄청나게 저렴했다.


그러다 메뉴판에서 ‘톤지루’를 발견했을 때는 반가워서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다. 매번 셀프로 만든 ‘야매 톤지루(?)’만 먹다가, 드디어 현지의 오리지널 톤지루를 먹게 되다니! 흥분해서 가는 귀가 잘 안 들리는 할아버지에게 거의 외치 듯 주문했다. “우선, 톤지루 하나랑요!!” 톤지루와 공기밥 소 사이즈, 계란말이, 명란구이를 시켰다.


한 10분쯤 기다렸을까, 음식이 나왔다. 그런데 나는 조금 당황했다. 드라마 속 톤지루도, 내가 만드는 톤지루도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 알록달록한데, 할아버지가 내어온 톤지루는 너무 소박했다. 된장국에 얇은 돼지고기 몇 점과 팽이버섯 아주 약간이 들어간 게 전부였다.


할아버지에게 이게 톤지루가 맞는지 묻자, 맞다고 하셨다. 내가 일본 드라마에서 본 거랑 달라서 놀랐다고 말했더니, 집집마다 톤지루 레시피는 다 다르다고 했다. 자기네 집 레시피도 그날그날 냉장고에 있는 재료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고. 오늘은 소박한 버전이라고 했다.


“톤지루는 돼지고기랑 된장만 들어가면 돼요. 나머지는 자유예요.”


할아버지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더 맛있죠. 집집마다, 날마다 맛이 다르니까.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아요. 격식 갖추고 모든 재료 다 챙기려 하면 귀찮아서 못 만들어요. 가정식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렇지, 그게 가정식이지. 그래야 매일 해 먹지. 당연한 말인데 할아버지의 말씀이 새삼 철학자의 한 마디처럼 들렸다.


문득 내가 발레를 처음 배울 때 생각이 났다. 발레는 준비물이 많고 예절도 많아서 선뜻 시작하기 어려웠다. 레오타드, 타이즈, 발레 스커트, 슈즈… 장비부터 돈이 많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학원마다 분위기나 룰도 달라서 겁이 났다. 그래서 몇 달을 미루고 미루다가 용기 내어 일단 1회 체험 클래스부터 등록했다.


그런데 무려 발레 경력 30년이 넘은 원장님이 말하길, “그냥 집에 있는 츄리닝 아무거나 입고 오세요.”
정말로 츄리닝을 입고 갔는데 발레를 배우는 데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수업 끝나고 원장님이 말씀하셨다.
“이것저것 격식 따지고 다 준비하려 하면 즐기기 힘들어요. 발레든, 어떤 운동이나 예술이든 마찬가지예요. 가까이에 두고 언제든 즐길 수 있어야 그 매력에 빠질 수 있어요.”


톤지루도 발레도, 결국 같은 이야기였다. 완벽하게 준비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재료로, 있는 마음으로 가볍게 시작하는 것. 그게 더 오래, 더 깊이 즐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일단 시작을 해야 즐기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아무튼 톤지루는 요즘도 내 1인 식탁에 가장 자주 오르는 메뉴 중 하나다.


<부담 없이 만드는 톤지루 레시피>

-삼겹살은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끓는 물에 데쳐 기름기를 살짝 빼준다. 시중 대패 삽겹살을 써도 된다.

-무, 당근, 양파, 연근, 감자, 버섯 등 좋아하는 채소를 한 입 크기로 썬다. 나는 조금 굵직하게 써는 걸 좋아한다.

-냄비에 기름을 두르고 삼겹살을 볶다가 채소를 마저 넣어 살짝 볶아준다.

-물을 붓고 끓이다가 거품을 걷어내고, 중약불에서 채소가 익을 때까지 끓인다.

-마지막에 곤약을 손으로 뜯어 넣고 한소끔 더 끓인다. 숟가락으로 뜯어내듯 잘라도 된다.

-불을 약하게 줄이고 일본식 된장을 간에 맞게 풀어 넣는다.

-팽이버섯이나 어슷 썬 대파를 넣고 1분 정도만 더 끓인 후 불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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