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를 하다 보면 상대방을 위해 혹은 둘의 관계를 위해 내가 희생해야 하는 것이 몇 가지쯤 생긴다. 예를 들자면, 나는 돼지뼈를 진하게 우린 일본 라멘을 상당히 좋아하는데 그걸 좋아하지 않는 남자친구를 배려하기 위해 데이트 코스에 라멘집은 절대 넣지 않는다든가(심지어 일본 여행 중에도 말이다), 기념일이나 축제 같은 것에 호들갑 떨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남자친구를 위해 생일이나 크리스마스에는 조용히 집에서 데이트를 즐긴다든가 하는 식이다. 아마 연애를 하는 누구라도 상대방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분명 있을 터인데, 문제는 한쪽에서 지나치게 많이 희생한다거나, 또는 한쪽에게 지나친 희생을 강요하거나, 또는 자신이 상대보다 훨씬 많은 희생을 하고 있다고 믿을 때에 발생한다.
마지막 연애에서의 나는 세 번째 경우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얼굴이 다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럽다. 고작 라멘집 데이트나 화려한 조명 사이를 뚫고 지나는 크리스마스 데이트 정도를 포기해놓고선 상대방을 굉장히 배려했다고 생각했던 오만함이란. 내가 그를 만나는 동안 얼마나 배려를 받았는지는, 함께 다녀왔던 일본 여행 사진을 정리하면서 알게 됐다.
이별을 맞이한 지 어언 1년이 지난 시점에 외장하드 정리를 하게 됐다. 그러다 연애 중에 다녀온 일본 여행 때 찍은 사진들을 보게 됐지. 일본에서 일회용 필름카메라를 사서 여행 내내 신나게 찍어댔었는데, 막상 현상을 하고 난 뒤에는 제대로 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이참에 한번 꼼꼼히 살펴볼까 싶어 한 장씩 뜯어보고 있는데, 비오던 교토에서 찍힌 여러 장의 사진을 보고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길을 지나는 이들에게 부탁해 찍었던, 그날의 모든 사진 속에서 우산은 내쪽으로 한껏 기울어져 있었다. 당시 내 남자친구는 한쪽 어깨를 전부 빗속에 내어놓으면서도 반대쪽 손을 뻗어 내가 비에 젖지 않도록 우산을 기울여 들고 있었다. 사진 속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방긋방긋 웃고만 있다. 아, 어쩌면 매 순간 최선을 다했던 건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나니 코끝이 찡해졌다. 깨달음은 언제나 좀 늦는가보다. '그때 내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잠시 떠올랐으나, 이내 슥슥 지워버렸다. 나는 참 좋은 사람을 만났었구나. 그래, 그거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