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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모니카 Jun 03. 2020

멜로가 체질이라니!

이토록 완벽한 제목과 내용





원래 드라마 보는 일에는 흥미가 거의 없었다. 도깨비가 한참 유행할 때도 '흐응'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나 하다가 작년에야 봤을 정도니까. 드라마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건 고작 2, 3년쯤 됐나? 전 남자친구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집에서 운동을 할 때나 장거리 운전을 해야할 때는 늘 드라마를 라디오처럼 틀어놓곤 했다. 그러다 재밌는 드라마를 발견하면 나에게 추천해주었다. 나의 최애 드라마 중 하나인 슬기로운 감빵생활도 덕분에 보게 됐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나랑 그 사람은 꼭 내 생일(12월 22일)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크게 다퉜다. 그럴 때면 나는 혼자 케이크를 숟가락으로 거칠게 퍼먹으며 하루종일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생일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곤 했다. 전 남자친구와 관련된 두 가지 이유로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셈이다. (올해는 그냥 할일이 없으니-심지어 다툴 일도 없으니- 드라마를 볼 예정)


각설하고, 어제부터 '멜로가 체질'이라는 드라마를 정주행 중인데 이거 정말 재밌다. 요즘 케이블이나 종편 드라마에는 그 흔한 재벌이 안 나온다. 가진 거라곤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생긴 애 하나뿐인 젊은 이혼녀가 어느날 갑자기 재벌 2세나 3세쯤을 만나서 팔자 펴는 얘기가 안 나온다는 말씀. (전부터 궁금했는데, 설정은 찢어지게 가난한 여주인공이 왜 매회마다 명품 옷만 골라 입고 나오는 것일까.) 대신 찌질거리는 취준생, 맨날 상사한테 털리는 직장인, 그냥 옆집 사람이 등장한다. 심지어 그 인물들은 전형적인 미인도 아니다.  


어마어마한 미인이나 재벌이 등장하지 않는 드라마에 사람들은 '이제야 현실성이 있다'면서 환호한다. 그런데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드라마를 만드는 건 환상을 파는 작업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별볼 일 없던 주인공 앞에 재벌이 나타나서 그의 삶을 구원해주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주 식상한 클리셰가 된 것이겠지. 누구나 꿈꾸는 환상이잖나. 그런데, 재벌이 등장하지 않으면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는 걸까. 글쎄, 나는 환상이 더욱 견고해지고 치밀해진 것 같은데.


내가 '평범하지만 훈훈한 외모를 가졌고, 나와 행동반경이 자주 겹치며, 자신의 삶에 치열하고, 도덕성이 평균 이상이며, 사랑의 상처를 가졌지만 점점 극복해나가는 중이고, 아주 튀지는 않으면서도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될 만한 패션센스를 지닌... 등등'의 이성을 만날 확률이 정말로 재벌 3세를 우연히 마주칠 확률보다 높을까? 아니라고 본다. '평범한 이웃'으로 포장된 요즘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사실 따지고 보면 재벌보다 더 완벽하고 훨씬 매력적인 캐릭터다.


그런데 일단 평범한 주인공이라고 포장을 해두고 보면 사람들은 껌뻑 속는다. 그런 사람이 진짜 현실적인 캐릭터라고 착각한다. "나도 저런 사람 정도는 만날 수 있지 않을까"하는 환상이 무럭무럭 자라게 된다. 하지만, 감히 내 연애의 역사를 바탕으로 말해보건대, 내가 만나는 사람은 결국 나랑 비슷할 수밖에 없다. 드라마 속 '가짜 평범함'에 눈이 멀어서 "왜 내 주변엔 이런 평범한 훈남(훈녀)가 없냐"고 따져봐야 별 수 없다.


연애하고 싶게 만드는 멜로 드라마를 보고 난 후기로 "아 연애 안 해야 겠다"고 말하는 건 장난 반 진심 반이다. 비현실적으로 매력적인 '평범한' 캐릭터들을 잔뜩 보고나면 자신이 없어진다. 내가 과연 저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매력이 있어야 매력 있는 사람이 내게 오는 것)


근 한달 간 퇴근 후에 매일 책 원고 작업을 하다가 어제부로 작업이 끝나고 나니 손이 심심해서 아무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쓰고 있다. 어제는 퇴근하고 새벽까지 드라마를 정주행할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러니까 결론은, '멜로가 체질' 보세요. 여기 등장인물들은 정말 '환상적으로' 매력적이니까. 


드라마를 보고 실제 행동으로 이어질 만큼 마음이 동하는 일은 크게 없는데, '멜로가 체질'을 보면서는 드라마 대본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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