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82세 생신을 축하하며
후회로 이어지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의 막막함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두 가지를 결심했다. 생각의 흐름이 과거로 이어질 때마다 운동이나 청소로 몸을 바쁘게 움직일 것. 미래의 막막함이 숨을 조여올 때마다 퇴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할 수 없었을 일을 계획하고 실행할 것. 그러다 보면 몸짱이 되어 있거나, 전에 없이 깨끗하고 단정한 공간을 마주하게 되거나,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누리며 내일을 그려볼 수 있을 테니까.
운동과 청소는 늘 나의 해야 할 일 목록에 있었던 항목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 해도 안해도 당장 티가 나지 않는 무언가를 매일 꾸준히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불어 늘 목록에 포함만 시켜놓고 실행하지 못해 온 독서와 글쓰기. 어릴 적부터 막연히 가져 온 작가라는 꿈이 무색하게도 직장생활을 하는 내내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아니, 읽지 않았다. 읽고는 싶었지만 늘 당장 해치워야 할 일이 있었고 읽어야 할 자료가 눈에 밟혔기 때문이라면 그건 단지 게으름에 대한 핑계였을까..
하지만 이제 나만의 루틴을 만들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생긴 지금이, 그 어떤 핑계도 댈 수 없는 오늘이 운동하기에, 주변을 정리하기에, 책을 읽고 사색하며 글을 쓰기에 가장 좋은 날이다. 운수좋은 날을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어쩌면 생각보다 길 수 있는 인생의 후반전을 보다 건강하게, 단정하게, 깊이있게,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흔치않은 계기이자 기회이니까.
그리고..
퇴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할 수 없었을 일들을 생각하다 한국에 계신 엄마가 떠올랐다. 회사 눈치를 보느라 2주 이상은 휴가를 쓰기가 힘들었고 내 가족과의 시간, 시댁 식구와의 시간도 중요했기에 결혼 후 한국을 방문한 횟수나 기간, 그 중 엄마와 함께 보낸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연찮게도 오늘이 엄마의 여든 두 번째 생신. 앞으로 몇 번의 생신을 축하드릴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감사하게도 아직 건강하신 엄마와 길게 마주하며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래서 엄마로서 만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그녀를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나의 퇴사는 내게 적잖은 기쁨을 선사해 줄 것이라 믿는다.
먼 발치에서 동경하며 바라보는 브런치 작가분들 중 지담님은 엄마의 유산이라는 프로젝트로 계속해서 성장해 가는 엄마가 아이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담은 책을 발간하고 계시고, 송지영님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드립니다"라는 작은 간판을 내 건 대필 작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기 시작하셨다. 이 분들의 글이 나에게 꿈을 심어 주었다. 나의 엄마는 나에게 무엇을 알려주고 싶으실까. 팔십여 년을 살아오신 경험과 지혜로 당신이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온 마음을 다해 들어드리고 싶어졌다.
내 삶에서 가장 바빴던 시간, 풀타임 직장맘으로 파트타임 로스쿨 생활을 시작했던 2주차에 아버지께서 지구별 여행을 마치시고 우주로 떠나셨다.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발견한 한 줄의 글-
"하루 저녁 정아와 즐겼다. 잠깐 보고 가니 섭섭하다"
결혼 후 짧은 한국 방문 중 하루 저녁을 함께 보냈던 그 날이 아버지에게는 더없이 소중하고 아쉬운 시간이었던 듯 하다. 보고 또 보아도 그리운 사이가 부모 자식 관계일 터. 부모가 되어 이해하게 된 그 마음으로 내 부모의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드릴 수 있는 지금이, 그래서 감사하다.
"엄마, 생신 축하드립니다. 곧 만나러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