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초보 러너와 좌충우돌 초보 작가의 든든한 파트너
새해 목표를 세울 때 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단골 메뉴인 운동과 글쓰기. 하지만 원숙미가 더해지는(이라고 쓰고 나이가 들어가는 이라고 읽는) 요즈음에는 그 농도가 사뭇 다르다. 과거에는 남들 눈에 예뻐 보이고 싶은 다이어트가 운동의 주 목적이었다면, 요즘은 내 몸 구석구석에 잠자고 있는 근육의 존재감을 느끼기 위해 달린다. 어릴 적 글쓰기의 목표가 남들 보기에 멋있어 보이는 그럴듯한 언변을 뽐내기 위해서 였다면, 요즘은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문득문득 낯설어지는 내 마음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글을 쓴다. 그리고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지인의 소개로 참여하게 된 러닝크루.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가는 나이의 멤버가 주를 이루는 이 모임은 나에게 달리기 뿐 아니라 인생도 가르쳐 준다. 고단한 한 주를 보내고 따뜻한 이불 속에서 달콤한 늦잠을 즐기고 싶을 법도 한 주말 아침마다, 이들은 함박미소를 머금고 동네 호수 공원에 모여 화이팅을 외치곤 달리고 또 달린다.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걸까 호기심이 생긴 나는, 다른 건 몰라도 뭐 하나 꾸준히 해 내는 일에는 자신이 있는 나는, 매주 주말 아침마다 출근하듯 약속장소에 나갔고 꾸준히 러닝크루를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두 달 여 만에 알아 버렸다.
따스하게 몸을 휘감는 이불 속 온기를 뿌리치고 서늘한 운동복으로 갈아 입을 때 느껴지는 그 뿌듯함을,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길을 달려 호수공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듣는 음악의 달콤함을, 보고 또 봐서인지 갈수록 정감이 가는 러닝크루의 얼굴을 마주할 때의 반가움을, 해가 떠오를 즈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영롱한 빛깔로 시시각각 물드는 동쪽 하늘을 바라볼 때의 경이로움을, 세상이 환하게 밝아질 무렵 목표치를 다 달려낸 스스로에게 느껴지는 대견함을,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가족과 여유롭게 브런치를 즐겨도 주말 오전이 다 지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해야지'를 '해냈다'로 기어이 바꿔낸 스스로에게 느껴지는 깊은 신뢰감을. 다 러닝크루 덕이다.
달리기와 어딘가 닮아 있는 듯한 글쓰기도 마찬가지. 브런치 글을 읽다가 우연히 접하게 된 라라크루 멤버 모집광고 속 문구가 처음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일상의 빛나는 순간을 가볍고 즐겁게 쓰자"는 의미의 라이트라이팅(light writing). 항상 재미보다 의미만을 추구하며 무겁게만 살아 온 나에게 꼭 필요한 처방이었다. 일기장에나 썼을 법한 글에 용기를 보태어 글을 발행하면, 누군가가 시간을 들여 그 글을 읽고 반응을 해 온다. 바쁜 일정에 잠식되어 오늘의 빛나는 순간을 생각해 볼 시간을 미처 갖지 못했을 때, 못지않게 바쁜 시간을 쪼개어 글감을 나누어 주는 글벗이 있다. 서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서 더 자유로운 관계인 우리는, 글쓰는 삶을 추구한다는 공통분모로 이어져 서로의 빛나는 순간을 응원하고 만끽한다.
한 동안 시작만 하고 끝맺지 못한 글들이 작가의 서랍에 쌓여갈 무렵, 라라크루 카톡방에 재미난 글쓰기 이벤트가 공지되었다. "이름하여 OO의 개똥철학-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에 여러분의 철학을 담아 주세요." 분주한 일상을 잠시 멈춰 세우고 생각의 바다를 유영했다. 눈 앞에 놓인 사물을 하나하나 훑어 보며 이야기를 심어 보았다. 그리고 내 선택을 받은 사물은 주말마다 러닝을 하러 나가기 전에 집어 올리게 되는 선크림. 태양 마중을 나가고 싶지만 그 햇살에 탈까 염려하던 내 마음을 담은 한 편의 글이 탄생했다. 이 모든 건 다 크루의 힘이다.
선크림의 개똥철학
햇볕을 가까이 하고 싶지만
햇볕을 피부에 품고 싶지는 않은
타인과 마주치고 싶지만
타인을 마음에 들이고 싶지는 않은
햇볕이 강할수록 높아지는 차단지수 처럼
외로움이 짙을수록 홀로 선 그림자는 길어지는데
시간이 흘러 지워져 가는 선크림 마냥
오고간 눈길만큼 스며드는 그대는, 나의 다정한 타인
경계를 둔 삶의 모순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햇볕을 쬐고 싶지만 화상을 입을까 두렵고, 사람을 만나고 싶지만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가 두려웠던 내 모습을 선크림에 투영하면서. 화상과 상처가 마침표가 아니라 느낌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 선크림을 비록 못 발랐더라도 강렬한 햇볕 아래 펼쳐질 눈부신 풍경을 마음에 담기 위해 문 밖을 나설 만 하다고, 결국 이별로 귀결된다 하더라도 함께 했던 짜릿한 교감의 순간 만큼은 추억으로 남을 테니 손을 내밀어 볼 만 하다고. 그렇게 내가 쳐 놓은 인생의 경계를 하나씩 허물다 보면 선크림 없이도 햇살을 마음껏 누렷던 과거의 자유를 되찾게 되지 않을까.
경계없는 삶을, 경계 너머의 세상을 꿈꾸어 본다.
#라라크루 14기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