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사랑이 되는 세상
인간은 사랑, 친절, 헌신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모두 태어남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 끝은 사랑, 친절, 헌신이 필요한 뿐인 존재로 모두 끝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런 인간의 본질적 필요와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늘어가는 1인 가구와 고독사 비율은 우리가 서로의 삶을 돌보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서로에 대한 돌봄의 기능이 상실되었거나, 돌봄에 대한 부재의 두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쩌다 인간은 이런 존재가 되었을까요?"
그 뿌리는 우리가 성장 과정에서 배워온 ‘가치의 기준’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존재의 본질이 아니라 성취의 크기로 평가받았습니다. 돈, 학벌, 직업, 연봉 같은 외적 지표들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반대로, 가난하거나 실패한 사람, 꿈을 찾아가는 사람은 게으르고 무능력한 존재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렇게 사회는 우리 안에 ‘비교와 수치심의 언어’를 새겨 넣었습니다.
그 결과 점점 더 '이해관계'만으로 세상과 관계를 판단합니다. 손익을 중심으로 타인을 평가하고, 스스로에게마저 존재가치를 매기게 되며 수치심을 가지게 만듭니다. 이것을 저는 '악의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고방식 속에서는 인간의 연대와 공감이 설 자리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이기심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경쟁심과 경계심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자신이 약하다고 느낄 때 부끄러워하고, 그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를 하거나, 타인을 경쟁상대로 밀어내거나, 더 약한 누군가를 향해 판단의 화살을 돌리곤 합니다. 그렇게 나와 너를 분리시키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으며 영적으로 융합되지 못한 채 스스로를 고립시킵니다.
우리는 점점 서로를 사랑하는 법보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타인과 감정을 나누기보다 경계하고, 도움을 주거나 청하기보다 거리를 두는 방식을 택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의 '얼굴 근육'이 이미 굳어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따뜻한 눈빛을 나누던 기억이 사라지고, 웃음 대신 계산된 표정이 자리한 사회. 그곳에서 온기는 사라지고, 마음의 보일러는 꺼져버립니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돌봄 속에서 태어나고, 돌봄 속에서 살아가며, 결국 또 다른 누군가의 돌봄 속에서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 '단순한 순환'을 잊을 때, 사회는 경쟁으로 차갑게 얼어붙게 되고, 내면의 사랑을 꺼내 보일 수 없게 됩니다. 경쟁의 끝에서 사랑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돌봄의 기능은 부재됩니다.
‘아픔이 사랑이 되는 세상’은 거창한 구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평가와 판단을 잠시 멈추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나의 기준을 내려놓고, 타인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때 비로소 우리는 공감의 언어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을 떠올려보세요. 아무 이름도, 직함도 없는 ‘그저 나’라는 존재를 말입니다. 어린 시절, 햇살이 내리쬐는 공터를 뛰놀며 해맑게 웃던 그 시절의 나를요. 그때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세상을 전부 사랑할 줄 알았습니다. 그 순수한 마음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
결국 인간을 살리는 힘은 '사랑'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거창한 희생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평가 없이 바라보는 작은 시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누군가의 고통에 조금 더 공감하는 일, 그것이 곧 ‘아픔이 사랑이 되는 세상’입니다. 그건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에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