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을 출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감정이 있다. 바로 ‘내가 지금 이 순간의 주인공이다’라는 믿음이다. 춤은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피어나는 예술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오롯이 자신을 믿고 몸을 뻗어나가는 행위다. 그래야만 ‘부끄러움’과 ‘창피함’이라는 거대한 쓰나미에 잠식되지 않고, 다음 동작으로 나아갈 수 있다. 결국 춤에는 자신을 믿는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다. 그러나 엉성하고 어색한 자신과 마주하며 무한한 창피함을 이겨낸 대가로, 한 번 춤을 배우고 나면 놀라운 자신감이 생긴다. 창피함을 극복한다는 것은 처음에는 죽을 만큼 어렵지만, 그것이야말로 춤을 배우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첫 관문이다. 자신과 마주할 용기, 그것이 춤의 출발점이다.
창피함을 이겨내기 어려운 이유는 명확하다. 자신의 몸과 동작이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기 때문이다. 나를 의심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고, 원하지 않아도 자꾸 옆 사람과 비교하게 된다. 그렇게 몸은 점점 더 굳어간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바꾸기로 했다. 그것을 동작의 완벽함에 두지 않고, ‘이겨내고 있는 나 자신’이라는 내면의 과정에 두기로 한 것이다. 그 감정을 견디고, 그 순간을 버텨내는 나 자신이야말로 가장 아름답다고 믿었다. 때로는 너무 부끄럽고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포기하지 않기 위해, 나는 팔목에 작은 다짐을 적어두곤 했다. 이상해 보여도, 죽을 만큼 창피한 순간에도 ‘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나를 대견하게 여기자고. 그 문장은 스스로를 향한 응원의 메시지였다.
‘하는 것의 아름다움’이 만들어준 힘은 강력했다. 스스로를 절대적으로 믿은 힘을 만들어 주었다. 그 강인함은 이후 내 삶에서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의 근원이 되어주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가족들로부터 쏟아진 외모 평가와 모멸감 속에서도 버텨낼 수 있었던 힘도, 5년 전 뜨거운 날씨 속에서도 혐오세력의 고성과 폭언이 쏟아지던 그날, 나를 둘러싸고 폭력을 가했던 교회 앞에서 가슴절체한 흉터를 드러낸 채 춤을 추었을 때에도, 다른 이에게서 오는 비난과 분노도, 더 이상 나를 건드릴 수 없었다. 수치심을 이겨내려는 강력한 노력들 덕분이었다.
그들의 교회 앞에서 춤을 췄을 때에는 단순한 공연이 아니었다. 존엄의 선언이었다. 나의 신체와 외모를 혐오하더라도, 나는 결코 그것에 지지 않았다는 증명이자 선언이었다. 나만의 무대 위에서 나는 내 ‘퀴어함’을 아름답게 드러내며, 스스로를 온전히 믿는 힘을 증명해 냈다.
그 순간의 나는 정말이지 아름답게 느껴졌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내 인생의 한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