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다.
집 바로 옆에 있는 우이천의 물소리가 창가를 타고 들려온다.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면, 어제저녁 운동으로 생긴 개운한 근육통이 몸에 남아 있다. 그 약간의 묵직함이 오히려 나를 살게 한다. 어제를 더 잘 살아냈다는 증거 같다. 커피를 시원하게 한 모금 마시고, 창문을 활짝 연다. 내 방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은 늘 같다. 부드럽고, 선선하고, 가끔은 장난스럽게 커튼을 건드리기도 한다. 하늘 위엔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그 밑에는 감나무의 감이 무르익어간다. 선선한 바람을 느끼면서 일어나는 것이 매일 반복되는 하루의 시작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행복이란, 대가 없이 그냥 주어지는 것 아닐까? 도처에 널려 있는 것 아닐까?"
"내가 그것을 보려고 마음만 연다면, 어디에나 있는 것 아닐까?"
커피를 다 마시고, 운동화를 신는다. 오늘도 산책을 나가야 한다. 이 동네에 사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산책이다. 집을 나서 몇 걸음만 가면 솔나무가 가득한 공원이 있다. 길가엔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가 바스락거리고, 솔향 가득한 공기가 폐 속 깊이 들어온다. 그 향은 묘하게 마음을 고요하게 만든다. 마치 오래된 친구의 품 같은 냄새다.
공원을 중심으로는 다양한 주택들이 자리한다. 원룸, 빌라, 아파트, 고급 연립주택까지도.
집의 모양은 달라도 통하는 공기는 같다. 나무의 향을 마시고, 바람을 느끼는 자격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 삶의 조건이 다르다고 해서 자연이 차별하는 법은 없다. 오직 밖으로 한 발만 내디디면 된다.
이 공기와 이 빛, 이 향을 누리는 데 필요한 건 ‘소유’가 아니다.
이 모든 행복은 사실, 내가 이곳의 호사스러운 자연을 느끼려는 마음인 것이다.
그 단순한 사실이 새삼 감사하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우이천이 반짝인다.
이 물길은 언제나 생명으로 가득하다.
맑은 물속을 들여다보면 물고기들이 바쁘게 헤엄치고, 자라가 느릿느릿 몸을 움직인다. 어느 날엔 고고한 왜가리가 서 있고, 또 어떤 날엔 귀여운 오리들이 네 마리씩 모여 놀고 있다. 신기하게도, 그 오리들은 늘 같은 자리에 있다. 마치 이 동네의 작은 수호자들 같다. 그 자리를 지키는 존재들.
나는 매일 그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거기 있어줘서 고마워.”
“오늘도 널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살다 보면, 이런 작고 단단한 ‘존재’들이 사람을 살게 한다.
그저 그 자리에 있어주는 존재.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다.
우이천의 물은 맑다. 쓰레기가 거의 없어 생명들이 건강하게 산다. 그 맑음을 보고 있으면 나까지도 정화되는 기분이다. 2년째 이곳에 살고 있지만, 이제는 고향보다 더 고향 같다.
매일 아침마다 북한산이 보이고, 저녁이면 우이천이 반짝이는 곳.
이 평범한 풍경이 내겐 세상 그 어떤 고급스러운 장식보다 값지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이곳에서 느끼는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기쁨이다.
30분 정도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북한산이 보인다.
북한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그날의 날씨를 알려준다.
봉우리가 조금 흐리면, 오늘은 미세먼지가 있거나 비가 올지도 모르는 흐린 날. 깨끗하게 보이면 오늘은 아주아주 맑은 날이겠구나.. 하고 예상하게 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계절이 바뀌나, 북한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그 거대한 산은 계절에 따라 옷을 갈아입을 뿐,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그 자태는 변함이 없이 경탄함을 자아낼정도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수많은 공기들을 만들어 내어 도시전체에 맑은 공기를 감돌게 해 준다. 늘 그 자리에 있는 산의 존재감 만으로도, '나는 여기에 있구나..' 하고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그 묵직한 존재감 하나로, 나는 매일 위로를 받는다.
동네에 돌아오면 언제나 마음이 놓인다.
내가 어떤 일을 겪었든, 어떤 감정의 파도를 건넜든
우이천도, 솔나무 가득한 공원도, 북한산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그래서 나도 그 앞에서는 작아진다.
작은 돌멩이처럼, 모래알처럼.
그러면서도 그 속에서 나는 안온하다.
산이 나를 감싸고, 나를 품어주는 듯한 느낌.
쌍문동은 나에게 그런 곳이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주거지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삶의 증거’ 같은 곳이다.
이곳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아침의 공기, 우이천의 물소리, 북한산의 품,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작은 생명들.
그 모든 것이 나에게 ‘도처에 널려 있는 행복’의 증거다.
행복은 결국, 멀리 있지 않다.
그저 내가 창문을 열고, 나가고, 바라보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이미 내 곁에 있었다는 걸, 이 동네가 매일같이 가르쳐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곳을 걷는다.
한 잔의 커피와, 한 줄기의 바람과, 한 마리 오리에게 인사를 건네며.
쌍문동,
나의 작은 세상이자,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가장 큰 행복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