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선물. 사랑

사랑 : 'LOVE ALL'

by 백안


여러분은 가장 위대한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세상의 모든 것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방법이 있다면, 믿으실 수 있으신가요?

오늘 저는 가장 위대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위대한 사랑이란, 어떠한 장애물이 있더라도 '계속해서 나아가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힘이야말로,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을 불가능하지 않게 만들어 줍니다.


자기 심리학자 하인즈 코헛(Heinz Kohut)은, 자신의 핵심이론인 자기 대상(Self-Object) 이론에서, 인간은 건강한 자아(self)를 형성하기 위해 타인을 ‘자기 대상(self-object)’으로 삼고 심리적 기능을 수행하도록 구조화가 되어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 사랑할 존재들을 찾습니다. 굉장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


물론, 그리고 그것을 시작할 수 있는 경험 또한 풍부하게 주어졌다는 점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사랑할 만한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를테면, 연인과의 관계나 무언가 사랑할만한 존재. 꿈.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한 사랑은, 그 시작보다 유지하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이 꾸준한 보상(Reward)이 되었을 경우에는 그렇지 않겠지만 보상보다는 대상으로부터 깊은 상처를 입었거나 배신감을 느꼈다면 더욱더 그럴 것입니다.

그 사랑이 나를 안전하고 지탱해 주거나, 지지해 줄 것이라는 믿음과는 달리, 정 반대의 감정들로 나를 아프게 하는 일들을 겪으면, 대상과의 거리감뿐만 아니라, 사랑에 대한 좌절감 또한 마찬가지로 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를 사랑하기를 본능적으로 갈망하면서도, 사랑의 안전성에 대한 불안감을 늘 갖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또 때로는 우리는 사랑이라 믿었던 감정이 좌절되는 경험을 하면서, 사람/공동체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관계들을 지속해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고민하기도 하지요.


'사랑'. 그것을 실천하기가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일까요? 오늘은 '사랑'을 지속해 나아 나는데 우리가 경험하기 쉬운 큰 방해요소에 대한 비밀을 풀어드릴까 합니다. 먼저 세상에는 앞서 말씀드린 과녁이 존재합니다. 이미 권력과 구조적 차이에 의해 나뉜, 보이지 않는 구분선이 존재한다는 뜻이지요. 그러한 구분선 안에서는, 인간에게 비애감을 자아내는 요소가 존재합니다.


'과녁의 정 중앙'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허황된 것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인간을 서열화시켜 통치를 하려는 개념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예를 들면, 완벽한 외모, 완전한 남성성, 가부장제가 사회를 지킨다는 믿음 등이 그러합니다. 과녁의 중앙에 가까워질수록 안전하고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으며,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허상과도 같은 그 개념은 좇는다면, 한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으로서 가치를 얻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에 따른 부작용들이 훨씬 더 많이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는 과녁에서 비켜난 곳에 훨씬 더 많은 인간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완벽한 외모를 가졌다거나 완벽한 남성성 수행과는 거리가 멀 것입니다. 가부장제 안에서 안전감을 느끼며 살아가지 못하는 존재들일 것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기준들을 수행하고 따르기를 강요하는 사회는 과녁의 기준에서 비켜난 인간들에게 큰 비애감과 슬픔을 가져다줍니다. 과녁의 기준을 강화하면 할수록, 국가는 국민을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인간이 과녁 중심으로 가려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바로 타인으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그 욕구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욕구란 과녁에 의한 지배상식을 그대로 흡수하며 만들어진 것이므로, 자기 사랑과 내적동기에 의한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에 결코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진열장 안에 장식되어 있는 트로피의 진열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장식장일 뿐입니다. 내 자아의 주인인 나와 밀착된 대상이 아닙니다. 나열된 외부조건일 뿐이지요. 자아와 진열장을 동일시하는 사람은 진열장 안에 트로피가 텅 비어있다면 자괴감과 수치심을 느끼게 됩니다. 즉, 나를 내세울 '외부조건'이 없다면 스스로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이자 타인에 대한 존경을 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스스로를 한정 짓고 마는 것이지요.


세상에는 무수히 만든 평가와 판단들이 존재합니다. 내가 속한 세상의 과녁처럼, 우리는 모두 '과녁'안에 살아가는 존재로서 외부로부터 누군가의 평가를 받는 존재들입니다. 때로는 그 평가적인 시선에 자신을 가두어두고, 스스로를 아프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실은 나의 외부세상에 존재하는 과녁의 기준일 뿐인데, 그것을 자신의 내부영역으로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우월적 존재로 보이지 않는다면 사랑받을 수 없다고 스스로 여기는 것이지요. 그 선을 분명 인식하고 있음에도, 그는 그 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평가를 받는다는 고통 속에서 살아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평가를 저항해 내지 못한 것입니다. 가장 마음이 아픈 상황은, 그 또한 자기가 겪은 그 비애감을 스스로 극복해 내지 못해, 그 기준들로 세상과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마치 전염병처럼 번지게 됩니다. 자신의 아픔이, 아픈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과녁에 들어가지 못한 인간들에게 끝내 비애감을 자아내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바로 수치심입니다. 수치심은 인간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강력한 수단이 됩니다.






저는 과녁을 추종하지 않고, 수치심에서 벗어나 건강한 사랑을 하는 형태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나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는 사랑'입니다.


나와 세상에는 언제나 '경계선'이 항상 존재해야 합니다. 경계선은 과녁을 직시하는 힘입니다, 내가 과녁이 정해준 기준 안에서 나를 평가하고 있는지,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적 사고' , '외모지상적 사고' 등등 사회적 과녁을 만들어내는 핵심 사상들이 그렇습니다. 그러한 이유들로 인해 내가 아프다면, 바로 그 아픔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 세상이 만들어 낸 소음들로부터 내가 신음하는 것입니다.


내가 속한 세상과 나 사이에는 언제나 경계선이 존재해야 합니다. 안전하다고 느끼는 유무에 따라, 그 선의 높낮이가 다를지라도, 그 경계선을 항상 인식해야만, 나의 바운더리를 안전하고 오롯하게 지켜낼 수 있습니다. 그래야 '경계'를 존중하고 받으며, 건강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나를 생각의 소용돌이에서 구출해 줄 구원자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힘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사랑 또한 지속해 나갈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하지요. 스스로를 보호하는 사랑에는, 모든 것에 대항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나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건강한 '자기 주장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권력의 우위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도 내가 나의 의견을 주장하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상황을 참고 견디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가져야만, 나에 대한 사랑과 자유 또한 확장됩니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모든 것에 선을 그을 수 있을 만큼 용감하고 용맹해져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위대한 자기 사랑과 자유가 찾아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외부적인 기준이나 선택이 당신의 정답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당신이 '어떻게 느끼는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자기 사랑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지켜지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의문'을 던지세요.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의문'을 던졌다면, 그 생각에 대해서 '완전하게 저항'하세요. 그렇다면 당신은 무한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으며, 스스로에 대한 위대함과 존경으로 그 사랑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내가 세상을 향해 외부로 확장하는 사랑입니다.


두 사랑의 방식은 모두 정 반대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의 사랑이 가능해야, 내 마음 안의 사랑이 지켜지어 두 번째의 사랑 또한 컵 안에 물이 흘러넘치듯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양면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세상과 경계선을 세워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만들어 낸 경계선(평가/판단)을 허물고, 사랑이 흘러넘쳐갈 때에 비로소 내가 속한 세상을 위대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위대한 사랑은 겸손함에서 옵니다.

누군가를 판단하지 않는 그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계속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평가와 판단은 내가 사랑할 대상을 제한하고 있는 경계선을 뚜렷하게 만듭니다. 내가 어떤 대상을 미워한다면, 먼저 나의 생각과 마음 안에 평가와 판단이 들어있는지를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의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지속가능한 사랑은, 오직 '겸손함'으로부터 옵니다. 그것은 타인을 평가하지 않는 마음 그 자체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기 전에, 상대방의 위대함을 스스로 평가하고 있지는 않는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설령 그 타인이 나에게 심한 행동의 잘못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가 스스로 반성할 능력과 내가 그를 용서할 가능성까지 스스로가 미리 섣부른 판단을 해버린다면, 사랑으로 나아가는 길 또한 내가 제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감해져야 합니다.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치지 않기 위해 나를 보호하려는 마음을 넘어서서 용기와 용맹함을 가지고 세상을 사랑할 준비를 하고 뛰어들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왜 사랑해야 할까요?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비애감'이라는 감정이 없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대해 가져야 하는 슬픔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 모든 것을 사랑하고 누릴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것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인생은 정답이 없다는 말이 참 많습니다. 그 말 뜻에는,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뜻 뿐만이 아니라, 정답은 각자가 만들어가고 찾아가는 것이라는 뜻이겠지요.



의문을 던지세요. 의문을 가져 사랑이 확장된다면, 거기가 바로 정답이에요. 바로, 당신의 환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오는 거예요. 환상이 현실로 되어감을 느낄 때, 세상은 주어진 곳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곳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거기가 바로, 아픔이 사랑이 되는 세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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