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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하마 May 19. 2024

전쟁 같은 근무

미국 간호사도 쉽지 않습니다

드디어 이 이야기를 할 때가 왔군요. 오늘은 간호사의 업무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근무하시는 간호사 선생님들의 업무 강도는 워낙 높은 걸로 악명 높기 때문에 이런 투정을 부려도 될까 싶지만, 미국에서도 간호사는 때때로 남을 살리기 위해 본인이 죽도록 일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간호사의 일

우선 간호사의 '규정 상' 업무량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일했던 미국의 병원은 중증도에 따라 병동을 나누었고, 따라서 각 병동별로 담당하는 환자의 수가 달랐습니다. 저희 병동의 경우 한국에는 없지만 준중환자실 정도로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중증도가 높아 Cardiac monitor로 모니터링이 필요한 환자들이 입원하는 곳이었으며, ventilator의 도움과 sedatives를 지속적으로 투여받는 중환자실에 가야 하는 환자들이 전체의 25%를 차지했습니다 (중환자실에 남은 병상이 없어서 저희 병동에 남은 경우가 많습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병동 내 침상은 총 40개, 그중 인공호흡기 치료를 받는 초초초중환은 10-15명 내외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원내 규정에 따르면 간호사 1인당 인공호흡기 치료를 받는 환자 1인 그리고 cardiac monitoring이 필요한 환자 3인 포함 총 4인의 환자를 담당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여느 병원과 다르지 않게 저희 병원 역시 간호 인력이 모자랐기에 일반적으로 인공호흡기 치료 환자 2-3명과 다른 환자들 4-5인을 배정받아 매 쉬프트마다 총 6-8명의 환자에게 간호를 제공했습니다.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교육받고 신규로 입사한 친구들의 경우, 업무량을 이겨내지 못해 금방 그만두거나 중증도가 낮은 다른 병동으로 옮겨가기도 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저는 한국의 임상 환경에서 강하게 키워졌기 때문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경험한 신규 생활, 저도 참 힘들었습니다. 신규 선생님들 파이팅!) 점점 무거워지는 업무 로드를 쓱쓱 해치울 때면 혼자서 괜히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거기까진 괜찮았어요.


전쟁의 서막

자, 드디어 하루가 밝았고 저는 가벼운 마음으로 아침 7시 반에 병동으로 출근했습니다. 늘 그렇듯 출근하자마자 배정받은 환자 목록을 확인하는데 뭔가 이상합니다.

"Vent (인공호흡기) 환자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리고 나머지 환자가 넷...? 총 9명...??????"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차지 간호사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오늘 무슨 일이야? 환자 배정 이래??? 이게 가능해???"


차지 간호사가 말합니다.

"오늘 병가 낸 간호사들이 많아서 출근하는 간호사가 몇 안되다 보니 어쩔 수 없어. 사실 아까 Y가 출근하긴 했었는데 간호사 1인당 담당 환자 많은 거 보고 바로 뒤돌아서 집에 가버리더라고. 그래서 남은 간호사들에게 부담이 더더욱 커졌지. 오늘은 나도 환자를 봐야 해. 잘해보자." (차지 간호사는 병동의 전반적인 상황을 관리하지 환자에게 직접 간호를 제공하지 않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리하여 남은 용사들은 차지 간호사 포함 총 5명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차지 간호사를 제외하면 모두 파견직으로 일하던 외국인 간호사들이었네요. 저도 그중 한 명이었고요. 정규직 간호사들은 유급 병가를 받지만, 저와 같은 파견직 노동자들은 유급 휴가가 아예 없고, 정규직 간호사들보다 시급이 10불 이상 낮았기에 먹고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일하고 급여를 받아야 해서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미국인 차지 간호사와 4인의 필리핀 간호사 그리고 1인의 한국인 간호사는 전쟁 같은 하루를 시작하게 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오더, 그 꼬리를 끊는다는 것

이미 과중한 업무량으로 시작했지만 그날따라 끝없이 새로운 오더가 밀려들어왔습니다. 결국 수간호사 선생님까지 투입되어서 응급이 아닌 오더는 대부분 취소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의사들 쪽에서는 치료계획에 변동이 생기기 때문에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그들도 병동에 와서 보니 상황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죠. 


미국의 병원에서는 의사와 간호사가 주종관계가 아닌 협력 관계이기 때문에, 간호사는 본인의 의견을 (의사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는 모두의 앞에서) 당당히 밝힐 수 있습니다. 의사, 다른 병동 간호사, 유닛 매니저, 약사 등 다른 사람들과 간호사는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존중하며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함께 일을 합니다. (한국의 병원환경을 경험한 많은 간호사들에게 이런 점이 미국 근무의 매력으로 다가올 것 같아요.)


최소한의 응급 오더만 진행했지만 애초에 간호사 한 명 당 담당한 환자의 수가 규정의 2배에 가까웠기 때문에, 간호사들은 점심 식사도 못한 채 업무를 계속했지만 모두들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서야 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침 7시 30분부터 밤 10시까지 내리 14시간 30분을 일했네요. 함께 근무한 간호사들 대부분이 시니어였지만, 그날 근무가 끝나고 다 같이 탈의실에 모여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맡은 바 책임을 다 해야 한다는 생각에 도망치지 않고 버텼지만 그날 저희 정말 힘들었거든요. 직장에서 성인 여자들 다섯 명이서 끌어안고 우는 상황, 그려지시나요?



성역은 없지만 우리는 지켜낼 수 있다

위에서 설명드린 바와 같이 한국에서 뿐 아니라 미국의 병원에서도 업무량이 과다해지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미국에선 오버타임 근무도 수당이 나오고, 점심을 못 먹고 일하는 경우 점심시간에 대한 수당도 나온다는 점이 있겠네요 (하지만 이 또한 스스로 나서서 챙겨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번 일해보고 나니 차라리 오버타임도 안 하고 점심도 챙겨 먹으며 따로 수당을 안 받는 게 건강에 좋을 것 같긴 하더라고요.


저 일이 발생한 날은 무척 힘들었지만, 어려운 일 한번 겪어봤다고 그다음부터는 업무를 대하는데 훨씬 수월해졌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봤자 그날만 하겠어'라는 마음 가짐이었달까요. 뿐만 아니라 그날 함께 근무했던 간호사들과는 '우리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서로 도우며 하루를 버틴 사람들이다'라는 전투애가 싹터서 더더욱 깊은 유대관계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힘들 때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는 말들을 하잖아요. 그 전쟁 같은 날 그들도 저를 보았고 저도 그들을 보며 서로의 문제해결 능력과 책임감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도 함께 일하는 날엔 "오늘 같이 근무하는 사람 중에 @@이 있네? 그렇다면 걱정 없지!"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 공유해 드린 제 경험이 미국 간호사를 준비하시는 많은 분들에게 미국 병원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보여드렸길 바랍니다. 미국에 간다고 삶이 드라마틱하게 나아지기보단 저런 힘든 일을 한 번씩 겪어나가면서 점차 개선되는 것 같습니다. 이미 미국에서 간호사로 열심히 활동하고 계신 선생님들께는 존경의 박수를 보냅니다.


(커버 이미지 출처: Eugène Delacroix - Le 28 Juillet.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 Liberty Leading the People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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