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말 다른 느낌의 '천천히'
위로의 천천히 vs
직장생활을 하면서 평가와 경쟁 사이에서 이쪽저쪽으로 바쁘게 치이던 때가 있었다. 점점 더 삶에 여유가 사라지고 어느 날부터는 이러다가 '나'라는 본래 나다운 모습마저도 되찾지 못할 정도로 산산조각이 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한 긴장과 불안 속에서도 겉모습만큼은 아무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씩씩한 모습으로 우뚝 서있느라 퇴근길은 항상 피곤에 절어 있었다. 퇴근길에 우연히 마주쳤던 교통표지판 "천천히 Slow"를 보면서 눈물이 왈칵 흘러내렸다. 무생물인 교통 표지판이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천천히 천천히 가되 괜찮아."라고 나를 위로하면서 안심을 시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는 위로의 천천히 교통 표지판을 볼 때마다 마음이 뭉클거렸다. 항상 '천천히' 교통 표지판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고, 유난히 힘들고 지친 날 유독 '천천히' 교통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퇴근길이 매번 다를 리도 없는데, 평소에는 그냥 보지도 않고 지나쳤던 교통 표지판이었는데, 마치 저곳에 저 교통 표지판이 올래 있었었나? 싶을 정도로 불쑥불쑥 힘들 날 나에게 찾아와서 위로의 메시지를 주고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시절에 나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은 가족이나 친구의 말 한마디도 아니고, '천천히' 교통 표지판이 아니었다 싶다. 천천히 가도 괜찮다는 말 한마디가 주는 위로의 힘이 컸었다.
요즈음에는 직장생활이 아닌 사업을 하면서 라이프사이클을 나의 컨디션에 맞추어서 유동적으로 시간을 쓰고 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직장생활을 하면서 휘둘렸던 평가와 경쟁의 긴장감은 내 일상에서 찾아볼 수 없어졌고, 나는 온전한 나로 회복을 하게 되었다. 나의 본래 나다운 모습을 완전히 까먹기 전에 직장생활을 그만둔 것이 그래도 회복을 하는데 작은 희망의 동아줄이 되어 주었다. 나다웠던 모습을 하나 둘 다시 찾아 나가면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주고 셀프 응원을 해주면서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을 발견하고 키워 나가고 있는 것이다. 삶의 안정감과 만족감이 커져가고 있을 때즈음, 어느 날 운전을 하면서 미팅 장소로 이동하고 있는 길에 예전에 봤었던 '천천히' 교통 표지판을 지나치게 되었다. 예전에 느껴졌었던 위로의 '천천히' 교통 표지판이 이제는 위로가 아닌 인정의 마음으로 내가 다가온 것을 알아차렸다. 이제는 더 이상 '천천히' 교통 표지판을 마주하더라도 마음이 울컥하지가 않고 눈물이 나기보다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나의 모습을 관찰하게 된 것이다. 천천히 살아가면서 이전보다 더 큰 행복을 느끼고 있다. 교통 표지판이 나에게 "천천히 사니까 어때? 나는 네가 천천히 가면서 안전하게 이 순간의 행복을 만끽하면서 지나치기를 바라." 하면서 말을 건네주는 것 같았다. 이제는 인정의 '천천히' 교통 표지판의 안내에 따라서 천천히 천천히 발을 내디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