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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 am as I am Feb 17. 2024

자유가 와도 자유를 누릴 수 없는

날개를 달고 자본주의 디톡스 비행을 한다.


자유가 와도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어렸을 때부터 나는 구속이 싫었다. 자유분방하게 My Way 철학으로 사업가이시면서 음악과 발명을 취미 삼아 당신 멋대로 사셨던 아버지와 반대로 사회적으로 지켜야 하는 규율과 예의, 도덕, 에티켓을 강조하셨던 어머니 사이에서 나는 이쪽으로 가지도 못하고 저쪽으로 가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던 시간들이 많았다. 돌이켜보면, 한때는 아버지의 철학을 따르며 내 마음대로 마음껏 하고 싶은 일을 저지르면서 살았던 시간도 있었고 어머니의 철학을 따르며 학급에서 누구보다 예의 바르고 성실하게 봉사상과 성실상을 타고 에티켓을 주제로 작은 책자를 만들어 여름방학 과제로 제출을 하기도 했다. 

어떤 자리에서도 본인의 뜻을 굽히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왜 저렇게 고집스러우실까, 어떻게 저렇게 막무가내로 사실 수가 있나 이해가 안 되어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그러한 당당한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사회의 어떤 목소리에도 굴하지 않는 자신감. 그것은 나에게 큰 영감이 되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아버지의 그러한 모습은 나에게 본보기가 되어 불합리한 상황에서는 'NO'를 말할 수 있는 자신감과 용기가 넘쳐 났다. 무서울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아버지가 있으니 뒤에서 나를 지지하고 응원해 주실 거라 마음 깊숙한 곳에 알게 모르게 든든한 나무 기둥처럼 여기었는지도 모르겠다. 엄격하고 무서웠던 아버지를 알게 모르게 나는 동경하고 존경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회에 나가서 남(타인) 좋은 일 할 필요 없다면서, 너 스스로 향기 나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던 말씀을 아버지 앞에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듯 무심하게 반응하였지만 나는 아버지의 그 말씀이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아 나의 사회생활을 때로는 어렵게 만들었다. 나는 절대로 사회화가 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으로 조직과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들에 쉽게 타협하지 않았다. 물론, 사회생활이 길어질수록 알게 모르게 조직에 적응하면서 무기력하게 타협을 해야만 하였고 '아. 이게 세상의 이치구나.' 하고 숙연해지고 공허해지는 날들이 다가왔다. 그렇게 리더가 되고 초년생 때 '나는 절대 사회화가 되지 않을 거야!' 했던 나는 어느 정도 사회화된 동물이 되어 있었다. 물론, 사람이 타고난 본성이 멀리 가지는 못하니 완벽한 사회화된 동물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이물질이 끼어 있는 것 같은 이질감이 드는 동물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조직에서 리더로 15명 정도의 팀원까지 매니징 하는 나름 큰 팀으로 키워 나가면서 조직의 편보다는 팀원들의 편에서 내가 생각하는 합리와 정의의 기준에서 싸워야 하는 날들도 있었다. 때로는 내가 굳이 이 장소에서 총대를 메고 있는 것인가 생각이 들어 지치는 마음이 올라왔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그러한 시간과 경험을 통해서 남(타인) 좋은 일만 한 것이 아니라, 나만의 향기를 만들어 왔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켜야 하는 나를 지키며 왔다. 

반면에 어머니의 철학에 따라 예의 바르게 이쁘고 곱게 자란 딸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어머니에게 보여 드리기 위해서 적당한 선에서 나의 표현과 욕망의 자유를 억제하였고 그렇게 나는 다듬어진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올 수 있었다. 아버지의 철학만 있었다면, 독불장군이 되었을 테고 어머니의 철학만 있었다면, 이쁜 로봇이 되었을지 모른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극과 극의 철학은 때로는 어디를 향해가야 할지 인생에서 많은 고민과 방황, 혼란을 야기하였지만 양쪽의 영향을 받은 지금의 나는 적당히 나를 지켜가면서도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으려 하는 유형의 인간이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자유'에 대한 요동쳤던 갈망은 적당한 파동으로 조율이 된 것이다. 그러한데 여전히 나는 '자유'에 대한 갈증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은 것 같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짧게나마 완전한 '자유'를 체험할 수 있기는 한 것일까? 세상이 인간을 향해 외쳐 대는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상업적이고 현란한 콘텐츠와 메시지들에 이쪽으로 휘몰아쳤다가 저쪽으로 휘몰아치면서 우루루루 쏠려 다니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보이지 않는 자본주의의 손이 우리의 완전한 '자유'를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유'를 맛보기 위해서 로봇새에 올라타 바람을 느끼며 하늘을 날아 본다. 나를 어디로 데려갈 수 있니? 땅에 발이 닿지 않게 날개를 달고 자본주의 디톡스를 해본다. 

        



고독이 마침내 다다르는 곳은 어디인가? 자신의 파멸인가 아니면 재창조인가? 

창조를 위해 고독은 꼭 필요하다. 

물론 그 대가를 훗날 치를 수도 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고독이 없어서는 안 된다. 


_장 그르니에 <일상적인 삶> 에서 '고독' 중에서_


2024 01 04 날개를 달고 자본주의 디톡스 비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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