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인데] 왜 자꾸만 뭐가 되라고 하나요?
나는 줄곧 ‘나의 존재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왜 태어났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수도 없이 되물어야만 했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고 눈과 귀와 입이 열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주변 어른들의 말과 행동은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차곡차곡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손자를 원하셨던 할머니가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네가 아들로 태어났 어야 했는데.”라던가, 둘째였던 내가 두 살 터울로 태어나 귀염을 떨며 사랑을 받는 모습을 보던 언니가 나의 얼굴을 쏘아보며 “너는 다리 밑에서 주어 왔어. 널 봐 봐. 너는 아빠도 안 닮았고, 엄마도 안 닮았잖아.”라고 했던 말. 지나치는 길목에서 만난 옆집 이웃 어른들이 “네 언니는 인형 같이 하얀데, 너는 까맣구나. 언니는 엄마를 닮았네. 너는 할머니를 닮았나?” 하시면서 언니와 나를 두고 너는 누구를 닮았는데 너는 누구를 닮았다. 하는 이웃들의 흔한 수다의 장에서도 나는 포클레인 장난감으로 흙을 파고, 바비 인형에게 예쁜 옷을 입히고 역할극 놀이를 하고, 엄마와 아빠 흉내를 내면서 소꿉장난을 하면서도 눈과 귀와 입은 열린 채로 있었다. 열려 있는 눈과 귀와 입은 놀이에 집중하면서도 주변의 소리를 다 듣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맑고 고요한 물로 가득 차 있었던 마음이라는 공간 속에서 작은 파동들이 만들어졌다. 그러한 파동은 마음 안에 균열을 만들었고,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죄책감, 자책, 변명 거리를 만들어 내는 자원이 되었고 어떠한 조건도 이유도 없이 무한한 사랑과 보호를 마땅히 받아야 하는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일그러지고 기울어지고 구겨져버려 중첩과 결핍의 공간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파동을 만들고 조장하는 주범 이었던 어른들의 말들을 듣고 잠자리에 누운 날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태어나지 말았 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나만의 깊은 우물 속 질문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때의 밤하늘은 어느 때 보다도 암흑처럼 짙고 깊었다. 이불속에서 나는 왜 태어났는지,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 골똘히 고민을 하다가 답이 나오지 않으면 밤하늘이 보이는 창문을 열어 두 손을 모으고 짙고 깊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나는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나요? 내가 왜 태어났을까요? 나는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졌고, 역시나 대답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유년시절의 짙고 깊었던 밤들은 대부분 창문 곁에서 있었다. 결국 어떠한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사십이 넘은 지금도 나는 그 대답을 찾기 위한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세상의 시시콜콜한 파장에 동요되지 않고 “나는 나다.”라고 당당하게 답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지만, 글을 쓰다 보면 줄곧 나를 아는 이들이 알고 있는 나의 밝음의 존재 뒤에 꼭꼭 숨겨두고 있었던 짙고 깊은 우물의 빛깔이 화선지에 먹이 순식간에 여백을 메우듯 번져 나가 나의 밝음이 어둠으로 뒤덮이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늘 존재했었다. 이제는 꺼내기가 여간 쉽지 않았던 나의 어둠 속에도 밝음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여러 차례의 경험들 속에서 깨닫고 나니 어둡다. 밝다. 라는 언어의 틀 안에서 빠져나와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나”를 있는 힘껏 드러내 보이고자 글을 쓴다. 이 글이 밝음의 존재에게는 어둠의 존재와 화해하기를, 어둠의 존재에게는 밝음의 존재와 축배를 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 어떠한 하나의 존재로 자신을 정의하지 마라. 모든 존재가 나다.
이 글은 내가 나에게 하는 다짐들이기도 하면서, 나의 다짐들이 어떤 누군가의 다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며, 어떤 누군가에게는 헛소리로 흘러가 버렸으면 좋겠다.
“너무 오래 나는 맹목적으로 무감각하게 기어 다녔고, 너무 오랫동안 내 마음은 침묵을 지키면서 빈곤하게 한쪽 구석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에, 내 마음은 이와 같은 자기 탄식과 공포와 무서운 감정에 까지도 환영의 손을 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속에도 감정은 있었고, 불꽃도 타올랐으며, 심장은 움직였다! 비참한 가운데서 나는 어수선하게 자유와 봄과 같은 무엇을 느꼈다.”
_헤르만 헤세 <데미안>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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