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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유주 Feb 07. 2021

33. 아이의 영혼을 파괴하는 언어 폭력

부모의 말이 가진 힘

부모들은 또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이를 놀리고 비웃거나 아이에게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다. 

특히 자기 자신이 어린 시절 그런 일을 겪으며 자란 부모들의 경우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


<사랑받을 권리 The Undervalued Self> p.124 - 일레인 N.아론




하레 아빠의 여름 휴가가 되었다.

하레 아빠가 하레와 함께 지내는동안 나도 혼자만의 느긋한 여름 휴가를 즐기고 돌아왔다.

마지막 날은 하레, 하레아빠와 함께 물놀이를 다녀왔다.

하루종일 꺅꺅거리며 신이 나서 뛰노는 하레를 보는 일은 고되면서도 동시에 즐거웠다.




내가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기분 좋게 낮잠까지 푹 자고 일어난  하레에게 읽어 주려고 하레아빠는 책장에서 '매미'에 관한 책을 꺼내왔다.

이 즈음 하레는 '매미'에 매우 많은 관심을 보였다.

여름이 되서 여기저기서 우는 매미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산책하다가 나무에 붙어있는 매미 허물을 '으으으'하고 징그러워하면서도 유심히 관찰했다. 

그런 아들을 기쁘게 해주고, 제대로 놀아 주려고 신경써서 골라온 책을 읽어주다가 말고 하레아빠는 갑자기 하레에게 "뚱뚱하고 시끄러운게 매미랑 똑같네."하더니 자신의 말이 너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저녁을 준비하다가 나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멈칫했다.

와, 하레 아빠는 '저 발언'이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구나.

하레가 아직 '말귀를 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게 정말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내 귀를 의심했던 순간이었다.


저걸 '애정표현'이라고 하고 있는거야, 쟤는.

자기가 받아본 게 그런 거 밖에 없어서.

아무리 '아빠처럼 하지 않겠다', '엄마는 정말 치가 떨린다'해도 자기도 똑같잖아.

하지만 지나가듯 한 말에 너무 정색하고 지적하는 것도 어쩐지 이상한 것 같아서 몇 번에 몇 번을 생각해 보다가 이번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지난 번, 동생을 위한답시고 했던 충고가 마치 '엄마처럼' 상처를 주었던 경험도 있었기에 이번엔 좀 더 신중해지기로 했다. 




아이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그것을 내면화해 무의식 속에 꼭꼭 담아둔다. 
그리고 무의식 속에서, 예를 들어 "너는 바보야."라는 말이 "나는 바보야."라는 말로 바뀐다.
그것이 자신을 바라보는 가치 척도가 되는 것이다. 

자신은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고, 가치도 없는 사람이며,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존감 없는 사람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말의 힘은 그렇게 큰 것이다.


<독이 되는 부모가 되지 마라> p.137 - 수잔 포워드


다음 날,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하레아빠가 웃으면서 그 이야기를 또 꺼냈다.

뚱뚱하고 시끄러운 게 매미랑 똑같네!

아무래도 본인은 정말로 이 말이 재미있고 재치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할까말까 수없이 망설이던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 번에 내가 쌀통을 제대로 안 닫아서 쌀 벌레가 생겼었잖아~"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도, 누구라도 실수할 수 있듯이 지금 나는 너가 한 '실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니까 하레를 위해서 가드 내리고 들어줬으면 좋겠어.


어제 하레와 매미책을 읽다가 '뚱뚱하고 시끄러운게 매미랑 똑같네,'라고 한 말에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았는데, 그래도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하는 말인 줄 알았어.

오늘 그 이야기를 '또' 웃으면서 하는 걸 보니 '아, 지금 이게 재밌다고 생각하는구나.'라고 생각해서 몇 번이나 생각에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서 말하는 거야.


너도 다 큰 어른이고, 내가 뭐라고 너한테 잔소리할 입장도 못돼.

하지만 하레를 위해서 이 말을 꼭 해야겠어.

그 이야기는 '하나도 안 웃기고, 너무 잔인하고 충격적'이야.


니가 하레한테 '더러운 건 고모방에 버리는거야. 3D는 고모가 하는거야.'라고 말할 때, 너도 나도 그게 '농담'인 줄 아니까 웃을 수 있는거야.

그런데 만약에 내가 진짜 오갈 데 없는 상황에 너한테 얹혀 지내는데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나는 충격이 크겠지.

하레는 아직 뭐가 진짠지, 가짠지 판단할 능력이 없어.

그런데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내 삶의 토대를 제공해주는 '신'같은 아빠가 '살찌고 시끄러운 게 매미랑 똑같다'라고 한다면 가뜩이나 감수성이 뛰어나고 눈치가 빠른 하레는 분명 자기 자신을 샅샅이 뒤져서 자신의 '살찌고 시끄러운 부분'을 찾아내서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고 믿겠지.

그래서 정말로 '살찌고 시끄러운 사람'이 되거나 혹은 자기가 너무 시끄럽다고 생각해서 '해야할 말도 안 하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어.


너 진짜 하레가 살찌고 시끄럽다고 생각해?

아니잖아.

이제 통통하게 살도 오르고 말도 조잘조잘 하면서 활짝 피어나는 게 너무 예쁘기만 하잖아.


하지만 그건 '니 잘못'만은 아닌 게, 너도 니 엄마 아빠로부터 애정표현이랍시고 그런 인신공격을, 잔인한 농담을 일상처럼 들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그게 '재밌다'고 생각하는거야.


나도 그랬어.

나도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잔인한 말들을 내뱉으면서 내가 재치 있다고, 쿨하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어.

그런데 그 말들이 얼마나 잔인했던건지 무섭게 깨닫고 난 뒤에는 말하기 전에 늘 3가지를 생각해.

이 말이

1. 꼭 필요한 말인가

2.사실인가

3.친절한가


지금 하레 나이의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하는 말이 그냥 그대로 몸 속으로 들어가서 흡수되서 '자아'를 구성한다고 해.

집으로 치면 인생의 '기초공사'를 하는 단계에서 그런 잔인한 말로 기초를 쌓으면 너랑 나처럼 흔들흔들, 별 거도 아닌 일에도 흔들흔들 거리면서 무너져 내린다고.

나는 지금 기초를 완전 다 부수고 다시 세우고 있는 중인거야.

내가 내 인생을 잠시 멈춰두고 여기에 있는 이유는 하레가 흔들거리는 기초를 잘못 쌓아서 나중에 불필요한 고통을 겪을 필요가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 있는거야.


하레가 나한테 스스로 전화해서 '고모, 보고싶어'라고 할 수 있을때까진, 그 기초공사를 마무리 하는 동안만이라도 돌보미 아주머니들에게 전전하지 않도록 여기에 있는거야.

하레를 위해서라면 내 인생의 그 정도는 흔쾌히 줄 수 있어.

그리고 '궁극적으론' 나 자신을 위해 여기에 있는거야. 

나중에 그때 할 수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떠올려 보면서 하지 않았던/못했던 나 자신을 자책하면서 후회하고 싶지 않아. 

또 하레를 통해 오히려 내가 배우는 것이 풍요롭도록 많기도 하고.


우리 엄마도, 아빠도 다들 그 기초공사가 잘못되어 있는 사람들이잖아.

따지고보면 가해자라곤 아무도 없이 피해자만 잔뜩 양산된채로 대를 이어서 이 잔인함이 전해져 내려 가는거잖아.

나는 여기서 멈추고 싶어.

이걸 하레에겐 물려주고 싶지 않아.

아들한테 그런 말 하지마.

아들한테 말할 땐 항상 그 세 가지 생각해.

그리고 하레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건, 일단 너 자신도 너를 그렇게 생각한다는거야. 아주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그거 늘 무섭도록 자각해 줬으면 좋겠어.




하레가 태어나기 전, 가끔씩 가족모임에서 하레아빠와 오랜만에 만나면 우리는 서로를 향해 살벌한 디스전을 펼치곤 했다.

심지어 우리 둘의 이런 살벌한 디스전은 나르시시스트인 하레엄마조차 화들짝 놀랄 정도의 수위였다.


나: (평소보다 조금 살이 오른 동생을 보며) 이야~ 아주 돼지가 다 됐네? 요즘 살 만한가봐?

하레아빠: 누나는 이제 몇 살이야? 이제 할머니네, 할머니. 관절은 멀쩡해? 


그렇게 칼같은 말을 서로에게 휘두르고는 각자 스스로의 현란한 언어적 재치에 뿌듯해 하곤 했다.

또 그게 우리만의 서로를 향한 애정표현이었다.


그땐 나도, 하레 아빠도 전혀 몰랐다.

그런 게 전혀 '애정'을 표현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라는 걸.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

그 누구도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라고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그 날 밤, 하레도 잠들고 나도 잠든 사이 내가 이 집에 내려왔던 첫 날, 하레아빠에게 선물했던 몇 권의 책 중 수잔 포워드의 <독이 되는 부모가 되지마라>를 하레아빠가 펼쳐서 읽은 흔적이 쇼파위에 남아 있었다.


여전히 나는 간혹 지나치게 말을 조심하고, 하레아빠는 간혹 미묘한 경계에 있는 말들을 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일단 내뱉고 자신의 '재치 있음'에 감탄하고 웃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춰 자신의 발언이 적절했나 생각해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엄마, 아빠보다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하레가 아빠와 잠들기 전, '매미'에 관해 나눈 이야기.




한편 성격 장애를 지닌 사람들은 자식을 망치는 부모가 된다. 그들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들이 자식을 다루는 방식은 지독하게 파괴적이다. '신경증 환자들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고 성격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말이 있다. 성격 장애를 가진 부모가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사람은 바로 그들의 아이들이다. 다른 상황에서도 그렇듯이 그들은 부모노릇을 하는 데에도 적절한 책임을 지지 못한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필요한 관심을 주기보다는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아이들을 밀쳐낸다. 자기 아이가 학교에서 비행을 저지르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성격 장애가 있는 부모들을 곧바로 학교 시스템을 탓하거나 다른 아이들을 탓하면서 그 아이들이 자기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태도를 지닌 사람들은 당연히 문제를 무시한다. 책임을 회피해버림으로써 성격 장애 부모들은 자기 아이에게 은연중에 무책임한 태도를 가르치게 된다. 결국 삶에 대한 책임을 피하려고 함으로써 그 책임을 아이들에게 부과하는 경우도 생긴다.

예를 들면 이렇게 말하는 경우다.

"얘들아, 너희 때문에 미치겠다."

"내가 아빠(엄마)와 이혼하지 않고 그대로 사는 건 오직 너희 때문이야."

"엄마가 너희 때문에 신경 쇠약이 됐다."

"너희를 돌볼 필요가 없었더라면 대학을 졸업하고 성공했을 거야"라는 식이다.

이러한 부모는 사실상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 결혼생활이 이 모양인 것도, 내 정신이 건강치 못한 것도, 내가 성공하지 못한 것도 다 너희 책임이야."

아이들은 이것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판단할 능력이 부족하므로 대체로 이런 책임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신경증 환자가 된다. 바로 이런 식으로 성격 장애를 가진 부모는 거의 틀림없이 성격 장애나 신경증이 있는 아이들을 만드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죄를 덮어씌운 것은 바로 부모 자신이다.


<아직도 가야할 길> M.스캇 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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