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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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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유주 Sep 14. 2020

8. 육아의 바다에서 길을 잃지 않고 항해하는 법

'자립'에 관하여


비단으로 서서히 목을 조르듯이, 아이를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가두어 자주성과 자기 결정 능력을 서서히 앗아 간다.
<폭력은 부모에게로 향한다-엇갈리는 부모와 자식에 대한 처방전> NPO법인 '뉴스타트 사무국' 대표 후타가미 노키



엄마가 나에게 하는 그 행동들이 나를 사랑하는 거라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요.

차라리 미워했으면 좋겠다.

날 보고싶어 하지 않았으면.

우리가 아무 관계도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서로가 지구 반대편에 태어나 평생 얼굴 볼 일도 없이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같은 땅에 태어나 죽을 때까지 닿아있는 인연으로 만나서 우리는 왜 서로를 이다지도 힘들게 하는지.

엄마는 날 정말 숨막히게 해요.

2004.05.26. 수요일의 일기




육아가 힘든 이유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이 태반이다.

이제 좀 알 것 같다가도, 다음날이 되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 헤매고 허우적거리다가도 '육아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만 기억하면 곧 정신을 차리고 나아갈 방향을 잡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혼돈 속에서도 단호하고 심플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도.


내가 경험한 엄마의 사랑은 '비단으로 목을 조르는 것' 같은 것이 전부였다.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지. 비단처럼 아름답고 부드럽고 고귀한 '모성'으로 아이의 목을 휘감아 질식시켜 버릴수도 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힝~ 엄마 보고 싶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엄마를 떠올릴 때 느껴지는 감정은 오직 한 가지였다. 

숨막힘. 

분명 '사랑'인 것 같은데, 그걸 받아들일 수 없는 내가 사이코패스인 건 아닐까?하고 괴로워하던 때도 있었다.


하레를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단순히 내 감정에 취한 '사랑'을 베푸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 필요한, 아이가 꼭 받아야 할 사랑을 베풀기 위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 고군분투의 한복판에서 '육아의 최종목표'가 무엇인지 깨달았던 어느 날에 관한 이야기.




어린이집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비눗방울 놀이를 하고 있는데, 같은 반 A의 엄마가 "어머, 하레야."하며 "B네 집에 놀러갈건데, 같이 갈래?"하며 초대해 주었다. 하레가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도 보고, 나도 엄마들이랑 친해질 겸 같이 가보기로 했다.


B네 집으로 함께 걸어가는 길에 비행기가 큰 소리를 내며 지나가자 하레는 경끼를 일으키며 달려와서 안겼다. 점차 안정되어 가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감이 심해서 큰 소리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A는 "나는 비행기 하나도 안 무서운데~!!"하고 말했고, A엄마는 그런 하레를 안쓰러운 듯 바라보았다.



세상에! 요즘 키즈노트 보면 하레가 누워 있질 않아!! 
키즈카페 가서도 누워 있던 애가!


"안녕하세요? 하레 고모에요."하고 인사를 하자, 집 주인인 B엄마가 반갑게 맞아주며 말했다.

하레가 안 누워 있는 걸 '처음' 본다면서 말이다.

키즈카페에서도 혼자 TV를 보며 멍하니 누워있던 하레


인사를 하자마자 아이들 놀이방으로 들어가서 5명의 아이들에게 파묻혀서 같이 놀았다.

A랑 레고를 조립하는 동안 C는 내 머리를 가지고 미용실 놀이를 하고 색칠 공부를 하는 D는 나에게 와서 잘했냐고 묻고 B는 소꿉놀이 주방에서 요리를 만들어 주겠다며 뭘 먹고 싶냐고 물었다. 하레도 그런 내 옆에서 친구들이랑 어울려서 '열심히' 놀았다.


'어린이집 선생님이냐~'고 농담하며 B의 엄마가 나와서 차 한 잔 하자고 했다.

하긴 하레엄마는 잠적(매일 어울려 지내던 엄마들한테조차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하고, 고모라는 사람이 와 있고, 애는 나날이 변해가고 궁금한 게 많을  것 같았다. 

엄마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에워 쌌다.

식탁에 앉아서 나와 하레의 상황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내 이야기와 하레엄마가 그간 쳐온 엄청난 스케일의 뻥들을 하나 하나 대조해가며 경악하기도 하고(A엄마는 거의 한 시간 내내 입을 쩍 벌린채로 다물지를 못했다.) 하레가 요즘 많이 달라진 것에 대해서 다들 놀라워했다.


하레는 여기로 이사온 이후로 내내 아프기만 하고, 어린이집에서도 키즈카페에서도 누워 있고, 친구네 집에 놀러와서도 친구들이랑 노는 대신 TV앞에만 붙어 있었다고 한다.

사람을 봐도 아무 반응도 없고 무표정하게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리는 아이였다고 했다.


B는 아주 똘똘하고 예쁜 여자아이였는데, 하레가 맨날 공룡흉내만 내고 꼬집어서 하레를 싫어했다고 한다.

"하레는 우리집에 들어올 수 없어!"라고 하며 현관문을 팔로 가로막아서 B엄마가 난처했을 정도로.

그러던 B가 3일 전부터 "하레도 이제 우리랑 같이 노는 친구야."라고 자기 엄마한테 말했다고 한다.


다들 하레, 엄마 없어서 불쌍해서 어떡하나하고 걱정했는데, 엄마 사라지자마자 애가 점점 살아나는 걸 보고 엄마들 사이에서 화제였던 모양이다.

집에 갈때도 울면서 친구 장난감을 가져가겠다고 떼쓰는 일 없이 가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라고 했다.


엄마들에게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하레가 폐렴에 걸려서 가래가 골골 끓는데도 어린이집에 보내서 친구들한테 다 옮기면서 민폐를 부리는 와중에  맘카페에 00까지 택시비가 얼마나 될까요?같은 글을 올리고, 머리 연장, 속눈썹 연장에 네일에 보톡스까지 맞고 나타났다는 것. 하아. 


아이 밥을 한달 내내 냉동 볶음밥만 먹여서 안쓰러워서 짜장밥을 해다가 줬다는 엄마도 있었다. 평소에도 하레를 대할 때, 말은 '상냥하게'하면서 표정과 행동은 우왁스럽고 아이를 거칠게 다뤘다고 했다.

B엄마는 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진작에 거리를 두었다고 했다.


아이 엄마들도 나름 쌓인 게 많았는지 이야기가 끝도 없이 줄줄줄 나왔다.

뭔가 궁금증이 해소되었다는 후련함과 함께 하레의 상태가 나날이 좋아지는데  대해 같은 아이 키우는 엄마로서 안도감 같은 것을 동시에 느끼는 듯했다.


우리 하레, 정말 혼자서 엄청 고생했구나.

대견하다, 싶었다.

이상한 하레엄마랑 공룡흉내밖에 못내고 자기 딸을 괴롭히는 남자아이를 그래도 같이 끼워주고, 놀아준 엄마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엄마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도중에 하레가 놀다가 내 옆에 앉아서 귤을 먹고, 사과주스를 마시기도 했다. 이런 행동에도 엄마들은 놀라워 했다. 우리 예쁜 하레가 동네에서 코찔찔이, 좀 이상한 애, 맨날 아픈 애 였다니...


간식을 다 먹은 하레는 내 손을 잡고 놀이방으로 나를 다시 데려갔다.

그리고는 친구들과 놀이를 하다가 중간 중간, 장난감을 꺼내기 전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나를 '판단의 보조기구'로 사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눈치를 보고 '해도 좋아'라고 하면 하고, '위험해' 하면 안하고.


이때 직관적으로 아이에게 '부모'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육아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가,를 깨달았다.


'좋은 부모'란 그저 '목발'같은 존재가 되어주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맞는지 틀리는지 내 얼굴을 보고 가늠해보기도 하고, 불안할땐 안겨서 위안을 얻기도 하고, 혼자서 하기 힘든 걸 해달라고 하기도 하고.

부모는 아이가 온전히 자기 힘으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그저 옆에서 버팀목이 되어주면 되는 거구나.


그리고 아이가 더이상 '목발'이 필요없이 건강하게 혼자서 걸을 수 있도록 응원해주는 것.

'목발'은 두 다리로 설 힘이 부족할 때는 꼭 필요하지만 없으면 '더' 좋다.

앞으로 닥칠 많은 상황들 속에서 '자립'이라는 육아의 최종 목표를 북극성처럼 바라보며 방향을 잡으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읽은 영유아 발달에 관한 책에서도 이 날의 깨달음과 비슷한 내용을 발견했다.



비계 scaffolding 설정은 유아의 인지발달이 실제적 발달 수준에서 잠재적 발달 수준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구체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계는 건물이 완성되면 철거하는 임시 발판으로, 아동에게도 한시적으로 도움을 주다가 아동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면 제거한다.

비계 설정은 단서 제공하기, 모델링하기, 설명하기, 질문하기, 토론하기, 공동으로 참여하기, 격려하기, 주의 집중시키기 등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비계 설정 시 중요한 것은 유아가 과제를 수행해 가는 동안 유아와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유아의 수행능력에 따라 도움을 조절해 나가는 것이다. 

유아의 현재 발달 수준을 이해하고 학습 과정에 유아가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유아의 발달 수준에 적합한 교수법을 채택하여 도움을 제공한다. 

도움이 많이 필요한 과제일 때에는 더 많은 도움을 주지만, 점점 유아 스스로 주도적으로 더 많은 활동을 해 나갈 수 있도록 도움의 양을 줄여나간다.
<영유아 발달 Child Development> p.89 - 김경철, 김은혜, 정혜승




이런 부모 대부분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식이 자립하여 자신이 불필요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아이에게 주입해 아이가 부모를 계속 의존하게 만든다.
<성장을 거부하는 사람들, 철부지 사회> p.58 - 가타다 다마미



'사랑'이라는 비단으로 아이의 목을 조르는 부모들은 아이가 없으면 자신이 '불필요한 인간'이 될 것을 두려워하는 불쌍한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이의 '자립'을 지지하고 돕기위해서는 내가 먼저 '제대로 자립한 어른'이 되어서 '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매우 어려운 숙제를 하나 받은 기분도 들었다.


매순간 이 '자립'을 기준으로 좋은 선택을 내리고, 좋은 하루들을 쌓아서, 좋은 인생을 만들어 나가자,고 다짐했다. 


'자립이란 의존할 수 있는 곳을 늘리는 것이며, 희망이란 절망을 나누는 것이다.'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소아과 의사 구마타니 신이치로 선생님의 말이다. 
구마타니 선생님은 또 이렇게도 말한다.

'인간은 물건이든 사람이든 많은 것에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따라서 의존할 곳을 늘리되 그 하나하나에 대해서 의존도를 낮추면
아무것도 의존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바로 이 상태가 자립이다.'
<나는 미니멀리스트, 이기주의자입니다> p.242 - 사부



하레가 나 말고도 의존할 곳을 늘릴 수 있도록 사람들과의 '상호작용'하는 법을 좀 더 집중해서 가르쳐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와 TV가 업어키운 '공룡 소년'인 하레는 공룡 소리는 종류마다 디테일하게 다르게 낼 줄 알았다.

하지만 말이 많이 늦은편이었다.


또래 아이(30개월~36개월)들은 제법 말을 잘하는데, 하레는 아직도 유아적인 말 밖에 못했다.

매일 하는 말이라고는 '아빠', '곤농(공룡)', '물', '시어' , '때때요(또 주세요)'뿐이고 지금까지 완전한 문장으로 말한 게 "나나나 더듀세요(바나나 더 주세요)."밖에 없었다.


그래도 친구들과 있는 모습을 보며 감정과 생각은 제대로 작동하고, 발달하고 있고 매우 정서가 풍부한 아이라는 증거들을 봤다.  




어린이집에서 더이상 누워있지 않고 씩씩하게 활동을 시작한 이 무렵의 하레



집에 와서 저녁으로 덮밥을 해줬더니, '아, 마이따! 마이따!'하며 잘 먹었다. 후식으로 귤도 4개나 먹었다. 

저녁을 먹고나서 하레가 갑자기 내 손을 잡더니 아빠에게 


엄마, 엄마예요.



라고 천천히 두 번이나 연달아 말했다. 

마치 '나도 이제 엄마가 생겼어!'라고 자랑이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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