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여름이 역대 최악의 폭염으로 기록된다는 걸 난 도무지 믿을 수 없다. 그 해 여름이 그렇게 더웠던가? 내가 기억하기로는 꽤 산뜻한 여름이었다. 그때 난 독일로 유학 가기로 마음먹고 일하며 돈을 모으기를 약 일 년, 드디어 하던 일을 모두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가 독일어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그 두 달 동안 정착할 도시를 정하고, 어학원과 집을 알아봤다. 비행기표도 끊고, 의료보험과 같은 각종 서류도 준비하고, 공증을 받고, 비자를 받았다. 아, 당시 사귀던 남자 친구와 틈만 나면 했던 애틋한 데이트도 빼놓을 수 없다. 폭발할 듯한 설렘과 끔찍한 두려움, 인생 대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그깟 더위가 무슨 대수랴? 꼽아보라면 지난여름이야말로 열병 앓듯 더웠다. 이 장의 이야기는 그러니까 그 여름이 시작되던 2021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6월 27일. 그날의 아침이 아직까지 생생한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눈을 떠 바라본 천장은 뭐 하나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였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초점 없이 공허한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며 누워있었는데, 아마 거기에 천장이 없이 하늘이 보였다 해도 난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곳은 베를린 남쪽에 위치한 Tempelhof. 2년쯤 전 둥지를 튼 단칸방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아침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대학교에 지원하기 전에 치를 수 있는 마지막 어학 시험을 그저께 죽 쒀 날려버렸다는 사실과, 1년 반을 넘게 사귀던 남자 친구와 헤어진 지 24시간 지났다는 사실, 그리고 코로나 백신을 맞은 지 18시간 지났다는 사실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백신의 효과인지 온 몸이 불덩이 같았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천근만근인 몸은 침대를 뚫고 땅으로 꺼져버릴 것 같았다. 마치 방망이로 흠씬 두들겨 맞고 길거리에 버려진 사람 같았다. 6.5평쯤 되는 아늑한 방과 푹신한 침대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잃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잃었다. 지난 3년 간 독일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바쳤던 노력과, 남자 친구와 함께 했던 시간과, 미래에 대한 희망까지.
시험 결과는 4주에서 6주 뒤에 나올 것이고, 최종적으로 불합격 통보를 받는다면 난 모든 짐을 다 싸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 1년, 유학 준비 비자 2년, 총 3년의 비자가 네 달 뒤면 만료되기 때문이다. 취업하지 않는 한 내가 받을 수 있는 비자는 더 이상 없다. 대학 지원 기간은 7월 말까지이므로 며칠 전에 쳤던 시험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한국으로 돌아가도 방법이 영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치를 수 있는 시험이니까. 하지만 글쎄, 독일에서 3년 동안 해내지 못했다면 한국에 돌아가서는 할 수 있을까? 한국으로 돌아가서 뭘 해야 할까. 편입? 재입학? 취업?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당장 눈앞에 천장도 뵈지가 않는데, 미래가 보일 리 없었다.
쏟을 수 있는 눈물은 이미 다 쏟았기 때문에 더 이상 흘릴 것도 없었다. 지난 한 달간 내 생활패턴은 이러했다. 새벽 5시쯤 눈을 뜨자마자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마치는 오후 4시면 이미 진이 다 빠져 연필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까 하는 극도의 불안감 때문에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다가, 운동을 하고, 씻고, 멜라토닌을 먹고, 일찍 잠에 들었다. 매일 유튜브에서 “마일리 사이러스 sexy leg” 영상을 보고 스쿼트를 하는 것은 그나마 남은 정신을 지푸라기 잡듯 하는 행위였다. 눈이 부으면 다음날 공부에 지장이 있어서, 자기 전에 우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절한 한 달이었다.
적어도 당시엔 실오라기 같은 희망이 남아있었다. 난 분명 합격할 거라고 마음을 다잡으며 하루하루 버텼다. 어학 시험에 합격하고, 독일 대학에 지원해서 진짜 유학생이 될 것이라고! 하지만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번 치르는 데 230유로(한화 약 30만 원)나 하는 시험을 지난 석 달 동안 다섯 번쯤 쳤으므로 눈치가 아주 없지 않고서야 점수 예측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이건 불합격이고 나는 망했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시험 결과가 나오길 기다렸다가 움직이는 게 현명한 처사다. 합격 여부에 따라 대학에 지원하거나,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더욱이 불합격이 거의 확실한 이런 상황에서 말이다. 그러려면 적어도 한 달은 더 베를린에 머물러야 한다. 이 지긋지긋한 베를린에!
나는 별로 이성적인 사람이 못 된다. 그리하여 6월의 마지막 날,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성의 없이 청소된 방 열쇠를 친구에게 전달하고 도망치듯 공항으로 향했다. 누군가의 부축 없이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상태였지만 코앞 결승선을 보고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는 마라토너처럼 집으로 향했다. 비록 실격한 마라토너지만.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았다가 집에 가서 무너져야지.
평소보다 긴 수속 절차를 모두 마치고 탑승구 앞에 앉았다. 짐 부칠 때만 해도 사람이 바글바글했는데 탑승구 앞엔 양 손에 꼽힐 만큼 사람이 없었다. 창 밖엔 여전히 거센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공항 안은 고요했다. 이렇게 설렘 없는 비행이라니. 하긴, 죄인 송환되는 마당에 무슨 얼어 죽을 설렘. 비행 스케줄이나 확인할 요량으로 가끔 핸드폰 알림을 들여다보며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러다 습관적으로 다시 핸드폰을 들었을 때, 어학시험을 응시했던 곳으로부터 이메일 하나가 와있었다. 그때 대체 난 무슨 마음으로 그 메일을 열어야 했을까? 그 순간이 어떤 순간인지도 모르고, 기대도, 예상도 하지 못한 채 메일을 확인했다.
수없이 받아본 시험 결과 메일이었지만 처음 보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Liebe Prüflinge,
herzlichen Glückwunsch! Du hast die Prüfung bestanden!
‘축하합니다!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제목부터 차근차근 다시 읽었다. 내가 미쳐서 잘못 해석하는 게 아닐까 싶어 그 짧은 문장을 구글 번역기에 넣어 또다시 읽었다. 속임수라도 쓴 사람처럼 초조한 마음으로 확인하고 또 확인하다가 눈물이 나 그만두었다. 어느새 ‘크응헉꺽’ 하는 이상한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눈물로 범벅돼 앞도 안 보이는데 그동안 고생했던 일들이 자꾸 눈앞에 떠올랐다. 어찌나 서럽게 울었는지, 그 광경을 본 사람들한테 기뻐서 우는 거라고 말해도 믿을 이 하나 없었을 것이다.
그토록 뜨거운 눈물을 흘릴 일이 내 인생에 또 있을까? 가장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있을 때 기적처럼 내려온 이 동아줄은 단순한 어학 합격증이 아니었다. 지난날의 꿈과 선택과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증명서였다. 이 증명서 한 장을 위해 얼마나 많은 걸 혼자 견뎌야 했나? 멀고 험난한 길이었다.
끝인 줄로만 알았던 3년간의 이 여정은 앞으로 닥칠 새로운 여정의 서막이 되었다. 베를린에서 또 한 번의 여름을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다음 여름도, 그다음 다가올 여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