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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안 May 18. 2023

이건희 전시 <어느 수집가의 초대>

2022.05.19


그리스 산토리니에 가면 그 분위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데

어제 날씨가 딱 그랬다.

따가워지기 직전의 따스한 햇살

머리카락을 스치는 선선한 바람

하늘의 푸르름 사이로 조금씩 섞여드는 주황색 노을

높은 빌딩숲 사이에서 갑자기 탁 펼쳐진 호젓함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겠어?


올해 나는, 이 늦봄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언제까지나 앉아 있고 싶은



내 사랑 남산타워


손끝에 잡힐 듯했는데 살짝 멀리 찍혔다.

나뭇잎에 내려앉는 노을











그리고


제목 그대로 '어느 수집가의 초대'

-그런데 이제 그 수집가가 너무 유명한



국중박어플을 냉큼 설치해 오디오가이드를 찾았다.

문외한일수록, 그리고 문외한이지만 이 작품이 왜 의미 있는지 알고 싶을수록 자료를 찾는 건 당연하다.

주입식 교육을 우습게 여기는 시대지만 치고 나가기 위해서는 기본기가 반드시 필요하다구요.

배경지식 없이 스쳐가는 sight만으로 그 작품을 느낀다고 말하는 건 내 방식은 아니다.

물론 짤막한 오디오로 다 알았다 할 수도 없지만.










안목 있는 수집가가 재력을 가졌을 때

- 그야말로 압도적인 컬렉션





안목 있는 수집가가 재력을 가지면 어떤 컬렉션이 나오는지

23,000점 속 엄선된 120점으로 느꼈다.

동양화부터 서양화까지

옛 제사장의 청동 방울부터 현대 대리석 조각까지

회화와 조각

고서적부터 백남준의 미디어아트까지

금으로 써 내려간 불경 필사

범종

인왕제색도

그리고 모네의 수련!






마을 입구에서 객을 맞이하는 석인상



조상들의 묘를 지켰다는 동자석



모네의 수련



총 250점을 남겼다는 모네의 수련

예술가들 정말 대단하지.

단순히 사건을 기록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시선을 전달하잖아.

브러시 터치만으로 뒤 풍경이 물로 느껴지게 하다니 늦봄이나 초여름, 노을 지기 시작하는 지베르니 같다.


몇 년 전 파리 여행 생각이 났다.

근교여행은 처음이라 지베르니 가기까지 용기가 필요했는데 기대보다 더 좋았다.

내가 봤던 눈부신 햇볕, 화려한 색채의 스펙트럼은 아니지만, 난 낮에 갔던 거니까.

저 순간의 수련은 빛바랜 듯 따스함이 느껴졌겠지



오랑주리도 참 좋았는데.

수련만 있는 줄 알았는데 거기에도 르누아르 세잔이 널려 있더라구요?

참 나, 좋겠다.










박수근의 소녀




김환기가 사랑했던 달항아리



김환기 화백이 처음으로 이 유형의 백자들을

달항아리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단색이 아닌 컬러 채색이 신선하다




그림이 아니라 장식을 새겨넣은 병



          

섬세한 세공의 벼루










그리고 두 번째로 좋았던 작품, 피리.



사뿐하다



막내딸이 갓 태어났을 때 완성된 작품이라고 한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을 얻은 행복감일까

아니면 도슨트의 말처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육아 속 한적함이 간절한 마음이었을까?

해석은 관객의 마음에 따라 달렸지

난 행복함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전시는 회화보다도 도기, 공예 컬렉션이 정말 좋았다.

고미술 잘 몰라도 보통 작품들 아니겠다 느껴지는 것이 조형적으로 완벽하다.

그 볼륨감, 균형감, 나석처럼 빛을 반사하는 유약의 질감에 정말 홀려 들었다.

기계가 만든 것처럼 완벽한 구조체.

렌더링도 없이 이렇게 어떻게 만들었을까?







스마트폰 카메라가 그 오묘함을 담아내지 못해 아쉽다



도기 컬렉션 센터피스 자리 당당히 차지한 청자. 눈 돌아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충격적으로 오묘한 색감.

가까이 가서 볼수록 은은한 푸른색이 배어 나온다.



인터넷으로 러시아 황실 주얼리 파베르제의 달걀을 보면서 생각했었다.

보석과 귀금속이 아닌데도 주얼리가 될 수 있나? 그냥 고가의 물건을 주얼리라고 할 수 있나?

의문이었는데 이 청자를 보고 해답을 찾았다.

될 수 있지. 왜 안 되겠어?

저 청자는 도기가 아닌 주얼리의 반열에 올라야 한다.










고려 후기, 의도적으로 변색한 청자





흠이 없다.

너무 조형적으로 완벽해서 오히려 모던한 인상을 주었다.










인왕제색도


여백의 미를 강조한다고만 배웠던 수묵화

하지만 이 사진은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 같다.

겸재 정선의 역작 인왕제색도.

비가 갠 직후 구름이 흩어지는 농담과 우직하게 자리한 바위산에 대한 묘사가 집요하리만치 세밀하다.











왕실의 기물이었다는 2인 반상








그리고

가장 좋았던 산정도




초여름 푸른 밤에 만난 도깨비



최고였어!

산정도=산의 정령을 그린 그림=산도깨비



작게 보면 그냥 그럴 수도 있다.

이번 컬렉션 회화들의 특징 또 하나가 작은 사이즈의 그림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이중섭 박수근 그림 중 작은 것들도 좀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 키 넘는 사이즈들이 많고

그래서 그림을 본다기보다 그림에 확 빠진다는 표현이 맞는 작품들이 많았다.

이왕이면 아이맥스 영화를 사람들이 찾는 것처럼.



산정도는 무조건 실제로 보아야 하는 작품이다.

푸른 밤 달빛을 받아 노랗게 빛나는 바위들 사이로 정령이 푸른 말을 타고 달린다.

청자의 따스한 은은함과는 또 다른 시퍼런 밤 같은 푸른색

풀벌레 소리 요요하게 들릴 때 확 튀어나올 것 같은 도깨비


사람을 압도하는 화폭의 스케일이 어우러져 매우 독특한 정취를 자아낸다.



원화 실제로 보면 느낌 다르다고들 하는데

그 다른 느낌을 제대로 내려면 화폭이 커야 한다는 걸 이번 전시에서 정말 많이 느꼈다.

태블릿으로 보던 크기랑 비슷해버리면 음 잘 그렸네.. 잘 만들었네 이상 감흥 얻기가 쉽지 않다.



큰 공간을 자기의 심상으로 다 채워버리는 것.

메모지 귀퉁이에 작게 낙서하거나 태블릿 그림 어플이라도 끄적여 본 적 있다면 이 대담함에 압도될 수밖에.









신라 시대 귀고리




향합


선을 파내 금속사를 새겨 장식했다고 한다.

어떻게 이렇게 섬세할까? 그렇게 오랜 옛날에.










범종


범종의 뒤편으로 에밀레종의 메아리를 재현한 파동이 굽이쳤다.

조용한 전시장에 계속 울리는 메아리가 마음을 기분 좋게 착 내려앉힌다.











   



금으로 그린 세밀한 불화.

서양이나 동양이나 종교화들은 할 수 있는 최대한 화려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절제된 치밀함이 느껴진다.

신앙심에서 비롯된 숭고한 느낌도 들고.











기록은 전승되어야 의미가 있다.

사진첩 어플 속 DB로 남기고 머릿속 기억으로 두려다가 블로그에 굳이 적게 된 계기.

이 행복감을 남기고 싶어서.




긴 호흡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세줄요약으로 안 되는 감격의 파노라마가 필요한 날도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이미지가 언어를 대변하고, 짤막한 숏폼컨텐츠로 모두 넘어갈 거라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사람들에게는 줄글이 필요하다.

15초 영상으로는 요약할 수 없는 스압이 필요해











무한히 펼쳐진 성단들 같다.

큰 사이즈가 주는 압도감이 관람의 대단히 큰 부분을 차지하는구나





마지막으로 꼭 말하고팠던 부분.

하나하나의 작품을 최대한 잘 보여주려는 주최 측의 고뇌가 이번만큼 잘 느껴진 전시가 없었다.


해당 작품에 가장 잘 맞는 디스플레이를 찾아 전시양태가 계속 변한다.

물감을 쌓듯이 그려 질감이 풍부한 회화라면 조명을 위에서 수직으로 쏘아 의도적으로 그림에 음영을 만들고, 관객이 그 질감을 느끼게 한다.

앞면만 보는 게 너무 아까운 도기는 후면에서도, 건너편에서도 같이 볼 수 있게 전후면 쇼케이스를 만들거나

고대 토기부터 청자, 백자까지 스펙트럼을 꼭 봐야 하는 컬렉션은 벽 하나를 통째로 할애해 발전사가 눈에 보이게끔 했다.

생활사를 담은 작품은 이웃집 마루에 걸터앉아 둘러보는 것처럼 공간을 만들고

조그마한 소품들은 재력가가 공들여 꾸민 장식장을 훔쳐보는 것처럼 꾸몄다.


그래서 슥슥 보고 지나칠 풍경이 하나도 없고 하나하나 발길을 멈추다 보니 그다지 쉬지 않았는데도 두 시간 훌쩍 넘게 관람하고 말았다.


잘 어울리는 색감으로 통일된 벽면과 차분한 음악, 조명 그게 다인 줄 알았는데.

보통 전시 가면 작품만 보이고 그 작품을 여기에 올려놓은 사람들까지 느껴지는 전시는 거의 없었는데.

전시장을 꾸민 이들의 존재감까지 처음으로 깊게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새로웠다.


장인이 가죽을 명품으로 만드는 것처럼 국립중앙박물관 측의 노력이 최고의 컬렉션을 길이 남을 전시회로 만든 느낌.



행복했다.

전시회에 이렇게 행복하기는, 또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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