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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안 May 24. 2023

여행과 관광의 차이를 아십니까

추억남기기의 추억





가을쯤 남편과 여행을 갈 예정이다.

아이를 갖기 전 할 수 있는 한 많이 걷고 우리만 신경 쓰면 되는 곳으로 가자고 졸랐다.

휴양지는 몇 살에도 갈 수 있지 않냐고.

작열하는 태양빛조차 닿지 않는 시퍼런 바닷속 산호초에 닿기를 더 좋아하는 남편은

조금 고민하다, 그래도 선선히 나의 의견을 받아주었다.




거의 9년 만의 유럽여행.

설레고 신나지 않을 수가 없다.

둘 중 시간 여유가 더 있으며 먼저 가자고 조른 쪽이 계획을 짜기로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스마트폰 없던 시절 동생과 떠났던 첫 유럽여행을.

놀랍게도 자기 mbti가 p라는 동생이 엑셀로 일목요연하게 일정표를 짜 와서 수시로 확인하며 다녔다.

그때도 부모님께 조르고 졸라 무리하게 떠났던 터다.

자녀 셋이 모두 교육비를 펑펑 쓰던 때라 집이 아주 여유 있던 시기는 아니었는데-

그래서 그 여행의 기억은 즐거웠으나 한편 마음속 약간의 무게감-저릿함-으로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유로 몇 푼으로 센 강을 훑는 바또무슈 저녁 표를 2장 구하고

거스름돈으로 비스킷과 오렌지맛 탄산음료를 사 잔디밭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지금도 동생과 이야기하는 건 바또무슈에서 본 파리의 야경이 아니라 귀부인처럼 도도한 파리의 비둘기들 속 어수선했던 우리의 마지막 비스킷이다.

스위스 호스텔 코앞에서 비에 젖은 쇼핑백이 찢어져 데굴데굴 구르는 소지품들을 주우러 뛰어다닌 기억도 생생하다.

정작 여행 중에는 운 좋게 날씨 잘 만나 알프스의 시원스러운 풍경을 본 걸 기뻐했었는데.


추억이란 결국 아름답지만은 않은 어떤 쌉싸름함이다.




다르게 말하면 추억은 결국

남들도 다 찍은 포토스폿 안의 인생샷이라기보다

어쨌든 나에게만 생겼던 어떤 한 단락이다.




여행.

첫 해외여행을 가기 전 유명인들이 여행에서 느낀 바를 미사여구 동원해 말하던 가슴 뛰는 영상들을 자주 찾곤 했다.

당시 인도여행 붐을 일으켰던 류시화의 책도 읽었고-겁이 많아 결국 가지는 않았다-



제일 많이 찾아본 건 여행사 홈페이지의 n박 m일 유럽일주 일정표.

여행사마다 조금씩 달라도 큰 흐름은 같다.

그 동네에서 절대 지나쳐선 안 되는 곳이 다 정해져 있기 때문.

그런 곳만 가고 싶지는 않지만 거기를 안 갈 수는 없는 이치?

문득 생각이 들었다.

여행사 홈페이지에서 잘 배운 일정으로 자유여행을 짠 거라면 그 여행은 자유여행일까 패키지 관광의 기출변형일까?

밥집 검색도 버거워 두 번째 유럽행은 여행사의 n개국 일주 프로그램에 동행했다.

알 거리를 꼼꼼히 씹어 모이주듯 먹이는 베테랑 가이드분 덕택에 의외의 좋은 경험이었다.

다만 나에게만 생기는 사소한 이벤트는 없었다.

버스는 제시간에 맞춰 도착했고, 식사는 딱히 흠잡을 부분 없는 무난한 맛이었다.

풍경은 유럽의 환상을 잘 채워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때의 좋은 기억으로 방콕 가족여행을 야심 차게 패키지로 떠났다가 크게. 아주 크게 망했다.

무능한 가이드는 궂은 날씨보다도 여행에 더 큰 영향을 준다는 교훈만 남기고.

아직도 그 여행으로 가족과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머리에 남는, 좋지만은 않았던 순간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족 내 인솔자로서 느꼈던 책임감과 내 손으로 결정한 여행사라는 점에서 피할 수 없었던 압박감도.



하지만 이후로도 여행은 계속되었고 되는 대로 패키지 관광과 (유사) 자유여행을 오갔다.

주변 사람들은 젊은 나이(?) 임에도 거침없이 여행가이드의 깃발을 따르는 나를 다소 신기하게 보았다.

그렇게 단체관광 가면 재미있어? 하고 묻기도 했다.

글쎄.

재미없을 건 무얼까?




쇼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그럴 수도 있다.

비슷비슷 잘 꾸며진 숙소들 속 하나를 골라 일정을 타진하고 예약하는 과정을 즐기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왜인지 자유여행이 '진짜'자유가 아니라면

그냥 잘 짜인 매끄러움을 즐기는 것도 좋겠다 싶었던 것뿐.

허상 같은 진짜를 찾는 것은 또한 나의 오랜 습관 중 하나인데 그것은 언젠가 이야기하기로 한다.



추억은 자유여행이라서 생기고 패키지 관광이라 없는 것이 아니었다.

패키지도 나에게만 벌어지는 사건이 있다면- 충분히 어떤 의미의 추억이 생길 수 있다.

몇 년 뒤 엄마가 '그래도 그때 방콕 가서 재미있었어'하고 말씀하셔서 얼마나 민망하던지.

그 여행은 나의 두 번째 무게감-분노에 가까운-으로 남아 있는데.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면

현대의 여행과 관광이 과연 차이가 있을까?

자유여행의 모든 일정을 구글맵으로 찍어서 도착시간까지 예상 가능한 지금?

어디를 갈지 알아볼 때 해시태그 많은 순서로 찾는 지금?

어학사전을 찾아본다.




여행 (旅行)  

[명사]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


관광 (觀光)  

[명사] 다른 지방이나 다른 나라에 가서 그곳의 풍경, 풍습, 문물 따위를 구경함.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결국 다른 곳에 가서 거기는 어떤가 둘러보는 것.

받아들여지는 뉘앙스로 관광이 좀 더 얕고 여행이 보다 깊은 느낌이 있기는 하나

모든 유명 장소가 아무튼 ‘맛집'이라는 키워드에 뒤섞이는 2023년, 그런 식의 비교는 무의미하다.

한때 여행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고 설파하는 것이 유행이던 적도 있었으나

지내는 장소를 얼마간 바꾸었다고 별안간 찾아오는 영적 깨달음은 없었다.




2023년의 작정한 관광객은 이제 더 이상 여행사 홈페이지만 의존하지 않는다.

스마트폰 좋다는 게 다 뭔가? 여행일정 어플을 설치했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최적경로 찍어주듯 최적의 여행경로를 찾을 수 있다.

세상 좋다는 말이 절로 터진다.

자유와 속박의 현대여행.

몇 물 간 흐름 같지만 여행 가이드북을 하나 사볼까.

하지만 생각나는 건 김사과의 <설탕의 맛>. 오랜만에 다시 펼쳤다.

모름지기 여행자라면 응당 느끼는 외로, 기다림과 지연 속 마주하는 심연에 대한 아름다운 승화 말고.

그런 여행을 하고자 떠났으나 이미 너무 고도화된 사회에서 매끄러운 유사관광을 하고 돌아온 이야기.

그녀의 일정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자기의 경험 속 느꼈던 생각이 그 순간을 특별하게 만든 것이다.





여행이면 어떻고 관광이면 어떠랴.

최선을 다해 즐거울 것이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약간 생경해진 우리 집을 마주하고 기묘한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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