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부유하는 인연들
설탕의 맛은 그런 에세이집이다.
이름이 설탕임에도 단맛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큼직한 신도시 상가.
화이트를 넘어 아이보리&우드톤으로 인테리어 된 카페.
개점한 지 3개월이 채 안 되어 깔끔하기보다 뽀득뽀득 새것 느낌이 물씬 나는 공간에서 혼자,
무언가 섞지 않은 커피 그 자체를 마시는 느낌.
그 커피는 따뜻할 수도 차가울 수도 있다.
통창 카페임에도 바깥의 풍경은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다.
가게 한 켠의 마셜 스피커에서는 인기 유튜브 채널의 플레이리스트 속 음악이 흐른다.
군중 속에서 홀로 귀가 먹먹하다.
2014년도 발매. 이제 거의 10여 년 전 책임에도 오래된 미래를 읽는 듯한 흐름.
스마트폰이 점점 사람들의 생활을 잠식해 나가던 즈음이다.
컴퓨터나 노트북 앞에 앉아 전원 스위치를 눌러, 스스로 새로운 세상에 진입하던 때를 지나
항상 누군가와 linked 된 삶으로 변해 가는 즈음.
그러나 이 에세이집 속 김사과가 스쳐가는 사람들은 linked 된 느낌이 크지 않다.
언젠가 훌쩍 떠날 인연이라 무슨 이야기든 털어놓을 수 있다는 점이 기묘한 편안함을 준다.
2023년의 사람들이 초연결 사회를 살고 있다면
이 책 속 인물들은 아주 크고 느슨한 그물의 끝과 끝에서 함께 부유할 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 김사과의 책을 읽고 생각난 두 가지 풍경.
1.
제주도 섭지코지 근처의 유명 관광스폿인 아쿠아플라넷을 찾은 적이 있다.
메인 수조가 일품이다.
정확히 말하면 메인 수조에 드리운 어두운 푸른색과, 그에 어울리는 배경 음악이 일품이었다.
메인 수조 주변에서 은은하게 공명하는 그 음악이
편안하게 바닷속에서 호흡하며 유영하는 기분을 주었다.
나는 물속에 떠 있는 듯하기도 했고, 바다를 푹 떠서 만든 크고 푸른 젤리를 보는 듯하기도 했다.
먹먹한 듯 귀를 울리다가 다시 해저로 나를 끌고 내려가는 느낌.
아쿠아플라넷 메인 수조는 유튜브 라이브로 24시간 스트리밍 중.
밤에 시청하기를 권한다.
https://www.youtube.com/live/tPWV-twokwM?feature=share
2.
얼마 전까지 넷플릭스의 자연 다큐멘터리를 자주 찾았다.
어쩌면 내용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전문가들이 한데 뭉쳐 완성한 구도와 색감, 음향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나의 문어 선생님'이다.
웬만한 사람 눈보다도 더 좋은 화질의 카메라로 찍은 아득하며 먹먹한 해저.
말 그대로 숲이 되어 끝없이 펼쳐진 해초들이 좋았다.
그 사이를 천천히 헤엄쳐 다니는 주인공은 다큐멘터리 속 자신의 표현처럼 다른 행성에 간 것 같았다.
원래 의도와 상당히 달라진 토막글이 되었지만,
이번 글은 <설탕의 맛>을 검색하다 발견해 낸 이 놀라운 댓글을 보고 쓰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서평에 달려 있었다.
캡처해서 갤러리에 보관하려다 나만 보기 아까운 마음에.
고전의 아성을 두려워하지 말고 파격과 개성의 인생을 살라.
한쪽 편을 들어 싸우기 바쁜 시대에 참 멋진 아우름이다.
원래 하던 대로 편하게 패키지 관광을 예약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한창 바빠서 휴일에 새롭게 계획을 짤 의욕이 많이 떨어지기도 했다.
나는 정말 '자유'여행을 하고 싶은 걸까?
자유여행이 옳다는 타인의 욕망을 함께 욕망하고 있지는 않았나?
그 여행은 정말 자유 여행인가?
여행사의 패키지 일정표, 다른 사람들이 풀어놓은 블로그 후기를 참조해 비즈 팔찌 엮듯 꿰어만든 여행도(유사도 80% 이상) 자유여행이 맞는 걸까?
타인과 거의 같고 결제 사이트만 내 손으로 링크 타고 들어간 자유여행.
여행을 자유롭게 하기보다
여행계획을 짤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선택했다.
레버리지와 아웃소싱의 시대.
이제 촌스러워서 안 한다는 여행계획 아웃소싱을 대차게 해 보기로 한다.
올 가을 누군가의 깃발을 따라 유럽 어딘가를 일주해야지.
단체 관광버스 안에서 나는 나른한 자유를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