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은 시작일 뿐
진료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의사가 아니다
내가 로컬 부원장으로 진료하던 초반에 계속 실수했던 이유는 쉽게 말하면 '자의식 과잉'이었다.
종합병원 레지던트 시절은 주도적으로 환자를 치료할 권한이 없었지만, 다르게 말하면 '도망갈 곳'이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이제는 모를 때, 환자가 더디게 나을 때,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증상이 나올 때 여쭈어 보러 달려갈 윗사람이 없다. 전체 치료 프로세스의 한 부분으로 일하다 이제 치료를 진두지휘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중압감은 예상보다 컸다.
원장의 외향적 성격이 더 중요한 개인 한의원에 취직했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난 겁이 많은 사람이니까.
한의계 프랜차이즈 중 제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자체 매뉴얼만 책 4권에 달하는 모 소아한의원 본원에 취직했다. 본격 진료에 투입되기 전 대표원장님의 진료를 참관하고 질환 설명, 치료계획 매뉴얼을 달달 외우는 기간만 몇 달을 거쳤다.
이제 말할 준비가 되었다.
그런데 정작 듣는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환자가 앞에 있는데도 유능한 한의사로 보이려면, 이번 주부터 진료를 시작한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만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정작 진료실에서 환자와 보호자가 주는 정보를 받아들일 틈이 없었다. 예진실에서 작성해 넘겨준 문진표 내용에 틀림이 없는지만 허둥지둥 확인하고, 어제 외웠던 데서 어긋나지 않게 잘 말하기에 급급했다. 그들 입장에서도 예진표에 다 적힌 내용 한 번 더 확인하는 게 다라면 굳이 예진을 거쳤어야 하는지, 원장실에 들어온 이유는 무엇인지 방향이 애매했을 것이다.
듣기가 안 되니 대답이 나갈 수가 있나. 리스닝이 안 되면 스피킹도 안 되는 것은 비단 외국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좋은 한의사는 질문의 수준부터 다르다
환자들이 차마 다 말하지 못하는 행간의 정보를 우리는 물어보며 얻어낼 수밖에 없다. 의료인의 경청은 친구 사이의 경청과 다르다. 가려운 부위를 잘 짚어서 긁어줄 줄 알아야 한다.
인턴 때 하루에 3번씩 병동으로 찾아가도 '허리 오늘은 좀 어떠세요?'하고 묻던 나에게는 '그냥 그래요'하던 환자가 교수님 회진 때만 되면 '여기가 찌릿찌릿 쑤시고 아파요'하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 머쓱해진 적이 많았다.
그 교수님은 두루뭉술 '어떠세요?'하고 묻지 않았다. 환자의 아프다는 허리를 직접 짚어 보거나, 다리 신경통 방향이 어디까지 뻗는지를 질문했다. 대답의 수준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초보 한의사들은 의사마다 환자의 말이 달라지면 그가 뭔가 숨긴 것처럼 억하심정이(?) 생기기도 하는데 사실은 제대로 물어보지 못한 잘못이 더 크다.
같은 진료 시간이라도 어떤 대화가 오갔느냐에 따라 차트에 남는 환자의 상태, 그리고 치료방향이 달라진다.
환자에게 할 말은 평소에 준비하고
진료실에서는 눈앞의 사람에게 집중
환자의 말을 우선 그대로 받아들여라
운동 중 갑자기 생긴 종아리 통증 환자를 진료한 일이 있다. 짚는 부위가 발목 뒤쪽 아킬레스건에 가깝고 약간 부어 있어 발목을 삔 것(염좌)으로 설명하고 치료했다. 물론 혹시나 해서 침 자체는 발목부터 종아리까지 넓게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결론은? 비복근 부분 파열이었다. 너무 심한 통증이 지속되어 정형외과 검사 후 받은 진단이었다.
담담하게 대했지만 한동안 환자 앞에서 부끄러운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왜 내가 아픈 곳 다시 한번 짚어 볼 생각을 못 했을까.
'운동하다 갑자기 종아리에 뚝 하는 느낌이 나더니 아팠어요'라는 말에 바로 인대 문제일 거라고만 생각한 것이 실수였다. 환자는 분명히 종아리라고 했는데, 부종은 이미 종아리에서 발목 쪽으로 내려와 있어(부종은 중력의 영향을 받아 시간이 지나면 아래로 내려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발목이 주된 문제라고 여겼던 것이다.
발목을 삔(염좌)일 경우 이어질 증상 변화와 치료계획에 대해 미리 설명하고, 이것에 벗어나면 X-ray 등 검사를 추가로 받으시라고 알렸기에 다행이지 환자도 나도 곤혹스러운 상황이 이어질 뻔했다.
초보라면 환자가 제시하는 정보에 섣부른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
우선 모두 받아들이고 체에 거르는 것은 그 다음이다.
Thank you, next
환자의 말을 잘 들었다면 그 다음은?
진단(결론짓기)과 치료 계획 전달(비전 제시)이다.
의료인은 결론짓기를 쉽게 생각해서도 안 되지만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한데 잘 모르는 내용을 ~그렇겠지 하며 유추하라는 말이 절대 아니다. 모르는데 왠지 그럴 거 같아서 A라고 말해 버리는 것은 사기꾼이나 다름없다. 보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되, 그 근거에 확신이 든다면 진단하고 그 내용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보건복지부가 발급한 면허증의 무게는 생각보다 가볍지 않다.
결론짓기는 의외로 우리의 머리에서 순식간에 지나가게 된다. 다음은 치료 계획 전달이다. 전문 연자가 아닌 이상 초반에는 말이 꼬일 수밖에 없다. 효과적으로 환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아주 세세하게는 아니라도 기승전결의 큰 줄기는 짜 두는 것을 추천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큰 병원으로 가 보세요'라고 말할 응급상황에 대한 대략의 분류를 따로 해 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