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써내려가는 당신의 이야기
진료 상담의 기승전결
기 - 발병일, 증상이 발생한 계기 또는 초반 증상
승 - 현재의 증상, 불편한 부분
전 - 의사의 환자 파악, 원인에 대한 간단한 설명
결 - 앞으로의 병증 진행방향에 대한 안내, 치료방법 제시
학생 시절 소위 '명의'라 불리는 선배 한의사들의 진료는 꼭 환자를 울게 한다고들 했다. 환자가 울면 사실 그 진료는 80 이상 잘 된 것이라고도.
울게 한다는 건 무슨 말이었을까. 막막함? 아픈 곳을 알아주는 데 대한 공감? 위로?
그런 해석은 너무 협소하다. 그리고 또 다른 '자의식 과잉'의 범주이기도 하다. 내 몸이 제일 중요해서 온 사람들이 우는 이유가 그저 의사의 말 한마디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의료인의 영향력만 평가하는 것 아닌지.
초보도 고수도 아닌 지금 한의사로서 다시 생각하면, 환자들의 눈물은 '깨달음'에 가깝다고 본다.
미처 몰랐던 부분을 새롭게 알게 된 놀라움, 바쁘게 살아내느라 잘 돌보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미안함, 이제라도 원인과 해결 방향을 알게 되어 느끼는 안도감 혹은 약간 늦어 버린 데서 오는 막막함도 있겠지.
불교에 '돈오'라는 말이 있다. 정수리에 차가운 물방울 하나 톡 떨어졌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처럼, 단 번에 얻은 깨달음을 이른다. 좋은 진료는 환자와의 대화와 여러 가지 의료정보를 토대로 환자에게 줄 수 있는 '돈오'에 가까울 것이다.
환자의 내원이 기승전결의 '기'라면
그다음 흐름은 의사가 이끌어야 한다
승-체크리스트를 만들어라
환자에게 진료가 돈오를 얻는 과정이라면 의사에게 진료는 무엇일까?
추상적인 좋은 표현도 있겠으나 현실적으로는 일단 원인 질환이 무엇일지 대략의 이름들을 떠올리고 아닌 것은 빠르게 소거법으로 없애는 Rule Out을 거치는 것이다.
이 과정은 머릿속 데이터베이스를 정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콕 집는 발췌인 만큼 너무 오래 끌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감별 포인트를 질문의 형태로 추려 체크리스트를 만드는 것이 좋다. 익숙해지면 알아서 말이 나간다. 그전까지는 질문을 보고 읽는 것이라도 매끄러우면 성공이다.
인쇄 후 코팅해서 진료실 책상에 부착하거나, 데스크톱 메모 앱으로 모니터에 항상 띄워두는 것을 추천한다.
안다. 의료인으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그 질환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해박한 설명으로 환자에게 납득시키고 싶은 것을.
하지만 일차진료를 담당하는 초보 한의사라면 해박한 지식을 가진 것보다도 급성 염좌로 인한 부종인지 봉와직염의 염증성 증상인지에 대한 감별을 똑바로 해 내는 것이 더 유능하다고 인정받는다.(후자에게 침 치료를 시행한다면 컴플레인의 새로운 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글을 3줄 요약하고 영상을 5분 순삭 하는 요즘 환자들은 절대 긴 진료를 좋아하지 않는다. 설령 자녀에 관한 이야기라도 그렇다. 10분을 넘기는 순간 부모도 자기 자식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핵심 질문은 5개만
일반적인 한의원은 주 환자층의 큰 범주들이 있다.
1. 통증: 허리, 발목 단순 염좌 / 척추 디스크 질환
2. 소화기: 식체 / 만성 소화불량 / 변비-만성설사 등 장 질환
3. 소아: 밥 안 먹는 아이 / 감기 달고 사는 아이 / 변비-설사 잦은 아이 / 아토피 / 소아성장
4. 부인과: 생리불순 / 산후 체력 저하 / 갱년기 증상
급/만성 여부, 신경통, 발열 등 O/X로 대답할 수 있으면서, X라면 소거 후 다음 질환을 떠올릴 수 있는 핵심 질문들을 찾는다. 미용, 소아, 피부 등 특정 주제가 있는 한의원도 가장 많이 몰리는 환자군의 특성에 맞춰 환자와 OX퀴즈를 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를 만들자.
질문은 5개를 넘기지 않는다. 5개를 넘기지 않는 이유는 그것만이라도 똑바로 다 물어보기 위해서.
전, 결-치료계획은 장황하지 않게
이제 환자가 아픈 몸으로 내원한 이유를 찾을 시간이다. 간단하게 말해야 환자가 중요한 부분을 잊지 않는다.
왜 아픈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증상 설명은 임상적으로 결론 내린 질환명, 이 질환의 일반적인 치료 경과가 해당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는 치료기간, 치료방법, 기간 내 내원 횟수, 필요하다면 비용 안내까지가 해당된다.
환자의 성향에 따라 간단히 답변하기 어려운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강조한다.
이전에 환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을 다 해 주자 마음먹고 스톱워치로 시간을 쟀을 때 의외로 5분을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컴플레인에 대한 응대조차도 10분 이상 이어지지는 않았다. 환자도 자기 시간이 소중하기 때문에 일반적 범주라면 길게 늘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매뉴얼대로 다 말했나 전전긍긍하던 진료가 20-30분씩 걸리고는 했다.(역시 대표원장님 컴플레인으로 이어졌다)
추가적으로는 환자가 제시한 정보를 처음 듣고 떠올린 질환 중 한두 가지를 함께 안내해 줄 수 있다.
어제 돌아눕다 뒷목에 담이 왔다는 환자가 만약 3달 전부터 목이 아플 때 팔이 약간씩 저렸다면, 그런데 오늘은 손이 저리지 않는다면 우선 단순 경추통으로 진료하더라도 경추 디스크 질환에 대해 가볍게라도 안내하는 것이 좋다.
방어진료 측면에서 차트에 남겨 두면 혹여 있을 컴플레인으로부터 의사를 지키는 효과도 있겠다. 하지만 이 과정은 한 번 오고 귀찮아서 다시 내원하지 않는 환자가 만약 통증이 악화되었을 때,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고 치료 시기를 놓치지 않게 도와준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