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동자가 타케트다
레지던트 2년차에 처음 외래진료를 맡게 되었다. 졸업하자마자 로컬 한의원에 취직한 동기들이 상대적으로 빨리 외래진료를 맡는 걸 감안하면 나는 3년 만에, 꽤나 늦게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마인드 준비가 너무 안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료를 마치 업무 쳐내듯 해 나갔는데, 그날이 마무리되어도 스스로 어설펐다 싶으니 찝찝한 마음으로 당직실에 눕는 날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진료에서 주변인이 되다
한방 신경정신의학과 교과서에서 '환자 역할'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환자보다도 중요한 것은 '역할'이라는 말이다. 본인의 몸에 불편한 부분을 호소하고 진료를 통해 이것이 해결되기를 원하는 행위를 뜻한다. 따라서 환자들을 대하는 의사에게도 '역할'이 주어진다.
진료는 서로가 일정한 행동을 수행하는 짤막한 역할극인 것이다.
나는 캐릭터를 파악하지 않고 대사만 외운 초보 배우처럼 진료실 의자에 앉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른 것보다도, 일단 사람 눈을 못 보는 게 문제였다.
환자 눈을 보면서 안녕하세요, 오늘 어디가 안 좋아서 오셨어요? 짤막하게 건네는 인사가 참 어려웠다.
이것도 아마 자의식 과잉의 한 종류로, 자신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환자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던 것이리라 생각한다.
문제를 고치려면 책부터 펴보는 성격답게 고쳐보려고 별별 '학원'을 검색했다.
아나운서 학원, 승무원 학원 등 고객응대 기술로는 탑급 학원들이 많았지만 소위 '영혼 없는' 진료가 될 것 같아 연기 학원을 선택했다.
연기 학원에서 배운 것
연기를 하려면 먼저 배역을 맡고, 대본을 받고, 캐릭터를 파악한다.
이 과정을 진료에 그대로 적용해 보자.
1. 배역을 맡고 - 의사로서
2. 대본을 받고 - 질환에 대해 문진할 부분들을 체크하고
3. 캐릭터를 파악한다 - 환자의 캐릭터, 그리고 자신이 의사로서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에 대하여
웬만큼 친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눈을 보면서 편안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 다행히 진료상담은 의사가 천만배우처럼 자신의 모든 내공을 쏟아내듯 보여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물론 연차가 쌓이면 달라지기는 하나, 이것은 나중의 이야기이다.
초보 한의사라면 자신의 '의사 역할'에 충실하면 되고 오히려 솔직해야 하는 쪽은 환자이다.
무대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대본과 동선을 체크하는 배우라고 생각하자.
진료 시작 전에 자신의 진료에 대한 대본을 쓰는 것이다. 질환에 대해 문진할 부분은 토씨까지 세세하게 적지 않아도 괜찮지만, 핵심 내용은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진료를 여는 인사와 환자에게서 처음 정보를 얻는 과정은 의식 없이도 술술 나오도록 대본을 쓰고 숙지하기를 바란다. 나는 혼자 거듭해 영상을 찍으면서 고쳐가는 방법도 추가했다.
간단한 이학적 검사, 환자의 답변 시간까지 포함해 5~10분 이내에 마무리되면 가장 좋다.
내 눈을 바라봐
뼈대를 갖춘 진료에 이제 '영혼'을 불어넣어야 한다.
가장 쉬운 방법이 있다. 바로 환자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와 앉는 처음 10초 동안은 그에게 집중한다는 의미로 손을 멈춘다. 환자의 눈을 제대로 못 본다고 해서 진료 내내 모니터만 볼 수도 없고, 환자 앞에서 삐걱댄다는 느낌만 깊어질 수 있다.
잘 듣겠다는, 의사 스스로에게 하는 지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환자의 눈을 보면서 환자의 손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살펴보자.
진료시간이 비교적 짧은 통증 환자들은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지만 만성질환이나 한약 상담 환자들은 상대적으로 긴 상담시간을 요하게 된다. 이때 환자를 잘 바라보면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말하면서 환자가 무의식적으로 짚는 곳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가장 주된 부위인 경우가 많다.
진료 전에는 진료 대본, 끝나면 진료 노트
진료 처음 하는 한의사라면 그날그날 오답노트 쓰듯 진료 노트 쓰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바로 달라지지는 않아도 한두 달 지나 쌓인 진료 노트들을 쭉 보면 매번 비슷하게 나타나는 문제점들이 보인다. 그러면 그 부분을 열심히 파고들어 고치면 된다.
친한 동기나 선배들에게 상담 내용을 보여주고 피드백을 듣는 것도 좋다. 이때 '너무 쉬운 거 물어봐서 무능해 보이지 않을까' 위축되지 말자. 원래 교과서와 실전은 다른 것이고 빨리 물어봐서 고치는 것이 훨씬 좋다. 고칠 기회를 놓친 채 연차만 쌓여 버린다면 그 편이 훨씬 암담하지 않을까?
진료 초반에는 스스로의 퍼포먼스에 불편한 마음만 갖고 지내다가 한두 달 시간 지나 진료한 날을 혼자 되짚어 본 날부터 진료 노트를 시작했다. 친한 한의사들에게 상담 내용을 전달하고 들은 피드백을 일기장에 정리하는 수준이다가, 케이스 스터디 양식을 참고해 점차 정형화된 형태로 바꾸어 나갔다.
진료 노트 또한 자유이지만 단, 길게는 쓰지 않는다. 증례로 발표할 내용이 아니라 혼자 체크하는 점검일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글밥 많은 진료 노트는 그날 쓸 때만 뿌듯하지 장기적으로는 양에 질려 잘 보지 않게 되고 쓰지도 않는다.
노트 마무리에 '고쳐야 할 점'을 쓰고, 슥슥 넘길 때는 이 부분만 보아도 핵심을 알게끔 간단히 쓰자.
진료 대본은 가능한 상세하게, 진료 노트는 간단히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