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약침
첫 마감을 완료했다.
지난주 첫 업무를 시작하고 쓴 글을 다시 읽는다.
고요하게 혼자 사유하면 되는 작업이 매력적.. 응?
무슨 말도 안 되는 낭만을 늘어놓았지.
그렇다.
저 글은 일을 '시작'한 직후에 썼기 때문에,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펼쳐질지 잘 몰랐다.
23.07.26
숨 가쁘게 파일을 넘기고 긴 숨을 뱉었다.
하지만 의자에 등을 기대며 고요하게 휴식할 여유는 없다.
이미 한밤중이고, 어서 자야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할 수 있다.
등이 정말 너무 아팠다.
스트레칭 대신 나는 거실로 나가 맨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으악 소리가 나온다. 뻐근하다.
이상하게 무슨 일이든 일을 할수록 한 번씩 아버지 생각이 난다.(아직 잘 생존해 계신다.)
키보드 작업만 하면 통증이 덜해질 줄 알았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생각이었다.
통증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기존 아픈 부위+많이 쓰기 시작한 부위로 새로운 통증이 생긴 것이다.
지난 일주일간은 글쎄,
사무직의 고충을 처음으로 깊게 느끼는 매 순간이었다.
더불어 의외로 내가 정말 몸 쓰는 일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자각까지.
자, 그럼 이제부터 일주일간의 병력 악화를 되짚어 보자.
일주일 내내 신나게 ctrl 키를 누르며 일한 탓에 왼손 새끼손가락 탄발지가 다시 심해졌다.
원래 있던 손목 통증은 물론이고.
손목을 뒤로 꺾은 자세로 타이핑을 계속해야 하니 추나 하며 손목 쓰는 거나 타이핑하며 손목 쓰는 거나 비슷하게 힘들었던 것이다. 나중에는 추나 할 때 손목에 감는 보호대를 차고 타이핑을 했다.
의자 높이도 잘 못 맞춰서 어깨관절에 힘이 들어가-내가 힘을 주고 있었는지도 며칠 지나서 알았다-추나 할 때도 안 아팠던 어깨까지 슬슬 무리가 왔다.
개발자나 수험생 환자들이 아프다고 했던 곳들이다.
나도 뒷목 아프고 허리 아프니 무슨 이야기인지 다 이해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어깨관절이 아프니 승모근을 써서 팔을 올렸고 그러면서 승모근이 옷걸이처럼 굳었다.
침 놓을 때는 허리만 아팠는데, 오래 앉아 있으면 이제 등이 아플 수 있다는 것도 새롭게 알았다.
당연히 종아리가 붓는다.
아주 장기간의 업무도 아니고 딱 한 번 일한 건데 이렇게 통증이 번지다니.
한의사 일의 대부분은 추나실과 침구실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컴퓨터 사용은 차트 쓸 때 잠깐이라는 것을 몰랐다.
몰랐다 그게 잠깐이라는 것도. 일할 때 컴퓨터를 많이 본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일이 빠르게 안 풀리면 정말 꼼짝 안 하고 몇 시간씩 앉아서 생각해야 하는 것도 몰랐다.
계속 안 풀리면 나중에는 한쪽 엉덩이가 들릴 정도로 다리를 심하게 꼬고 앉는 것도.
새로운.. 통증의 세계?
환자들이 생각난다.
아픈 곳을 줄줄 말하다가도, 너무 여기저기 아파하는 스스로를 머쓱해하던 사람들을.
그때는 그냥 아파서 오셨으니 잘 치료해 드려야지-정도의 감상이었으나 이제는 다르다.
정말 온몸이 아플 수 있구나.
모든 일은 정말 겪어 봐야 안다.
무슨 일을 해도 사람은 삭신이 쑤실 수 있다. 얼마나 아팠을까.
나는.. 무엇을 생각했던 것일까.
커피 한 모금, 풍부한 향을 느끼며
세련된 음악이 흐르고 조금 서늘한 공기가 팔을 스치는 카페에서 바쁘게 타이핑하는 노마드의 삶을 꿈꾸었다.
하지만 마감 맞춰서 일 끝내려면
노트북을 가방에 담아 가져가고 다시 세팅해서 구동하는 시간조차 다 낭비가 되니 그럴 수 없었다.
무엇보다 현재 하는 일에 지장을 주지 않고 마감도 제때 맞추려면
결국 언젠가는 나의 휴식시간이었던 모든 자투리 시간을 다 써야만 한다는 걸 왜 생각 못 했을까.
식사, 잠, 한의사 업무 외의 거의 모든 시간을 다 번역 일에 투입한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양질의 번역이 되었느냐면.. 글쎄.
초보 번역가의 번역이 그럴 수 있을까. 펑크 없이 마감을 맞춘 것으로 만족한다.
이게 무슨 말이지? 고민하며 가슴이 점점 답답해지던 기억은 고이 접어 둔다.
그런데 한 번 마감 넘기고 나서 의기양양하게 쓴 지난 글을 보니 참 세상에.
너무 아무것도 몰랐던 티가 나서 웃음이 났다.
한의대생일 때 상상했던 미래와 지금 현실의 격차를 알면서도 다른 직업은 뭔가 다를 거라 생각하다니.
인간은 욕망 때문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나 보다.
아니 다른 인간은 안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구나.
어제 마지막 검수를 진행하면서 예전에 꽃꽂이보다는 번역이 재미있겠지-하던 기억이 났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나 몰라. 이제 마감 쳤으니 다시 약간 시간이 생겼다.
꽃꽂이 원데이클래스를 알아보아야겠다.
다시는 가격을 지불하고 누리는 여유를 무시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큰 소비로 단번에 스트레스를 잠재웠다.
아이폰 14도 나온 지 좀 된 마당에 단종이 확실시되는 13 미니.
손목이 많이 아프면 큰 폰을 쓸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아, 그래서 번역은 단발성 도전으로 끝이냐고요?
아니오.
이것은 첫 번역의 어마무시했던 기억을 잊지 않고 복기하고자 쓴 구구절절한 기록이다.
언젠가는 이 날카로운 첫 마감의 추억을 되짚으며
참 못하는 일 도전한다고 애썼다-웃고
정말 아름답게 커피를 한 모금 머금는 날을 기대하면서.
더 원래의 낭만이라면
따사로운 휴양지의 햇살 아래 망고주스 착 들이키며 타이핑을 연속해 나가는 중에
다이빙을 즐긴 남편이 돌아오면 여유롭게 반기는 것이었는데.
1. 번역일 하면서 휴양지 갈 여유 - 없음
2. 휴양지 갈 때 번역 일이 주어졌을 가능성 - 미지수
3. 일하는데 여유롭게 남편을 반길 수 - 없음
등의 이유로 우선 미루어 두려 한다.
모레 가장 빠른 시간으로 한의원 예약해야겠다.
오랜만에 가 놓고서는 약간 머쓱하게 웃으면서 '너무 여기저기 아프다고 하죠?'라고 말할 내가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