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에세이 기고로 갑자기 촉발된 문학여성(?)의 여름. 인류에게는 작은 발걸음, 한 인간에게는 큰 도약이었다. '내 글이 팔릴 가치가 있다'는, 이 자신감이 채 꺼지기 전 17회 동서문학상에 거침없이 도전했다. 성인이 된 이후 자발적으로 참여한 첫 공모전이라 끙끙대면서도 어떻게든 글을 완성하려던 지난날들이 기억난다. 앞머리만 하염없이 이쪽저쪽으로 넘기며, 하루가 끝날 즈음엔 머리가 산발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 결과를 받아 보았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출판계가 오랜만의 단비를 맞은 지금, 소소한 기록을 나도 이렇게 남겨 본다. 첫 공모전에서 바로 수상했다!
언감생심 작품집에 실리는 것까지 목표했던 터라 아쉬움도 살짝 스쳤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르기를 바랄 수는 없지. 상위 120인에 든 것으로 만족한다. 접수된 수필은 3,401편, 거의 28:1의 경쟁률을 뚫은 것이니까.
비도 오고 궂은날이라 어떡할까-잠깐 집에 있다가 자축하러 카페로 외출했다. 추워지기 시작하면서 얼마 전부터 잡은 자수 파우치를 들고.
카페에 앉아 심사평을 찬찬히 읽었다. 한국인이 만성적 울분 상태에 있다는 이야기가 스친다. 크게 공감한다. 왜 울분이 쌓일까?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남과 비교하는 문화 때문에?
아니다. 불경기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며 사회적 동물이라면 비교를 피할 수 없다. 한국인들이 속에 울분을 쌓는 것은 편안하게 자아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차도, 집도, 가방도 계급 따라 장만하라고 우스개인 척 일일이 가이드라인 정하는 나라. 개인의 생각도 알아서 사려야 하는 눈치 문화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삼성 폰과 아이폰 아닌 다른 핸드폰을 쓰는 것마저도 '튀는' 행위로 간주하는 균질성에 때로는 질식할 것 같다.
그럴 때 언제나 글쓰기가 도움이 되었다. 글쓰기는 생각을 정리하면서 내면을 표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 자체가 치유의 효과가 있다. 글에 비해 그림이나 음악은 생각을 드러내기 위한 훈련이 더 필요하다.
그리고 무언가 직접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관객의 유무마저도 초반에는 중요하지 않다) 행위 자체가 건강한 발산이다. 화가 많은 사람이라면 경험하는 분야보다 직접 행위하고 창조하는 취미를 추천한다.
동서문학상 1:1 멘토링에서 '글 쓸 때만큼은 자유로워지세요'라던 이용임 시인의 말씀이 계속 남아 있다.
그간의 글이라 봐야 사실 대부분 일기였고 수필은 월간에세이 청탁으로 처음 도전했다. 일기와 수필은 '메시지'의 유무로 나뉘는데 이 주제를 담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이다. 허공에 발산하고 가벼워지려는 목적이지 누구한테 메시지를 남기려고 써본 적이 없으니까. 항상 이렇게 교훈적이어야 하는지 의문도 있다. 그래서 문체도 어딘가 무겁다.
지난 글을 가족들에게 보여 주었을 때 남동생이 나의 글을 '래퍼들이 자전적 이야기를 소재로 쓴 랩' 같다고 평한 적이 있다. 내심 놀랐다. 아니, 그렇게까지 처연한 넋두리 같았단 말이야? 그렇게 축축 처지는 글이란 브런치에 만연한 문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렇게 쓰고 있었다니. 담담함과 넋두리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요즘은 보다 산뜻하게 쓰는 것이 새로운 목표 중 하나이다. 그러려면 먼저 내가 사뿐한 사람이 돼야겠지.
월간에세이 원고청탁서가 쏘아 올린 아주 작은 공 덕분에 이렇게 또 다른 글을 쓰고, 도전하고, 평가받을 용기를 얻었다. 계속 써 나갈 것이다. 편집장님도 내가 이렇게 다음 글짓기에 도전할 줄은 모르셨겠지(?). 정말 덕분이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