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의 베란다로 오세요
가드닝이나 베란다 정원 가꾸기란 노년층의 취미인 줄 알았다. 살면서 본 최초의 가드너가 할머니였기 때문이다. 본인의 운신이 점차 어려워지는 와중에도 할머니의 손을 거친 화초들은 푸릇푸릇하게 피어났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을 수도 없고, 학명도 모르지만 자식과 손주 다 키운 어르신의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는 남달랐다. 할머니는 ‘감’으로 물을 줘야 할 때, 영양제가 필요할 때를 기가 막히게 알았다. 베란다 정원은 번성했으나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식물에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은 때가 되고 환경이 조성되면 알아서 바뀌나 보다. 그전 집에서는 베란다가 없어 꽃꽂이를 배우거나 생화를 사 보긴 했어도 뭘 키울 엄두는 못 냈었다. 하지만 새로 이사 온 집, 역대 최고의 더위 속 모든 생물을 삶아 버릴 듯한 햇볕과 습도를 느끼며 묘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질 좋은 햇볕에서 식물을 안 키우고 나만 키우는 건 좀 아깝다고.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는 것인가?) 그래서 낯선 동네에도 적응할 겸 당근마켓을 켰다. 당근마켓에 ‘식물’이라는 카테고리가 있다는 것도 그제야 처음 알았다. 벵갈고무나무가 보인다. 샛노란 무늬가 참 예뻤다. 가격도 2,500원? 식물 담긴 화분이 프링글스 한 통보다 싸다. 이 정도면 죽어도 아까운 돈은 아니리라. 이름은 벵갈이/벵벵이/갈갈이 중 벵갈이로 정했다. 그렇게 초보 식집사 생활을 시작했다.
고무나무는 죽이기가 더 어렵다는데
의욕에 찬 식집사는 물을 안 줘서가 아니라 너무 줘서 죽인다고 한다. 명심 또 명심했다. 당근 판매자와 채팅을 통해 이미 물 주는 주기를 체크했다. 순도 높은 햇볕을 받으며 여기가 고향땅 벵갈이라고 생각하렴 벵갈아. 의욕대장 집사의 마음을 몰라 주고, 벵갈이는 오자마자 야속하게도 갈색으로 변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고무나무 갈색잎‘이라는 주제로 얼마나 열심히 검색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는 원인이 과습, 저기서는 건조함이란다. 이유를 모르니 처치 방법도 모른다. 건조한가? 애꿎은 흙에 손가락만 자꾸 찔렀다. 손가락에 흙이 조금씩 묻기는 하는데 이게 완전히 마른 겉흙인지 습기가 남은 건지 알 수가 없다. 답답했다. 쌩쌩하게 왔던 벵갈이는 쪼글쪼글해졌다.
그럼에도 고무나무 죽이기가 더 어렵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잎 3개가 모두 쪼글쪼글해지는 타격을 입으면서도 벵갈이는 1주일에 하나씩 새 잎을 올리며 미친 생명력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 과거의 잎사귀가 더 윤기 없고 말라 보여 마음이 아프지만..
벵갈이의 병환은 계절이 바뀐 몇 주 뒤에야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있었다. 화상이었다. 고무나무는 잎에 물을 저장한다는 말에, 잎부터 물을 뿌리며 흙을 적시는 걸로 마무리했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물을 닦지 않으면 여름철에는 잎에 맺힌 물방울이 렌즈처럼 작용해 화상을 입는 경우가 잦다고 한다. 잎 닦는 건 영화 속 사장님이나 대감님들이 난초에만 하는 건 줄 알았다. 이후로는 물을 줄 때 키친타월을 꼬박 챙긴다.
햇볕 조절이 어렵다면 음지로 간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다음은 너무 쉽다. 식물을 내 손으로 들이기까지 3n년이 흘렀지만 두 번째 식물은 벵갈이가 오고 2주 뒤 바로 결정했다. 햇볕 조절과 통풍이 예상보다 어려우니까 그럴 것 없이 책상이나 집안에 두고 보기만 하면 되는 음지식물이 생각난 것이다. 처음에는 이끼로 직접 만드는 테라리움 키트를 떠올렸으나 상품 몇 개 보다보니 귀찮음이 커졌다.
아직 화원이라는 오프라인 공간에 진출할 용기는 없었다. 식물 구경은 네이버쇼핑, 그리고 당근마켓을 주 무대로 했다. 그러다 엄청 쪼그맣고 엄청 이쁜 화산석 화분을 발견했다. 이끼와 고사리로 만든 테라리움같은 화분이다. 주문한 연령대를 보니 다 동년배 여자들이구만. 디자인도 왠지 숲을 한 스쿱 퍼온 듯 힙하다. 좋아 그렇다면 결제!
새 친구의 이름은 ‘쪼꼬미’에서 줄여 꼬미라고 정했다. 꼬미는 콩짜개난 잎 하나가 살짝 접혔지만 아주 이쁘게 와 주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낮은 습도로 인해 이틀 만에, 빠르게 갈변했다.
이쯤 하면 우리 집은 식물을 모두 갈색으로 말려버리는 마법의 장소인가? 판매자에게 문의하니 과습은 아니라며 돔으로 덮어 두기를 추천했다. 꼬미는 조그맣지만 꼬미를 안정적으로 덮어줄 예쁜 돔은 없었다. 급한 대로 둥근 플라스틱 어항을 사서 뒤집어 덮었다. 이미 갈색으로 변해버린 깃털이끼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다행히도 며칠 뒤 후마타고사리에 자구가 생겼다. 신기하고 귀여웠다. 생명력이란 뭘까?
요즘 꼬미는 아크릴 온실에 산다. 온습도계도 함께 넣어 착실히 생육환경을 체크하고 있다. 오늘 검색해 보니 이끼도 갈변한 끝을 다듬는 트리밍이 가능하다고 한다. 안 그래도 진갈색이 되어가는 깃털이끼를 보면 마음이 아프니, 조만간 다듬을까 한다.
이젠 아무렇게나 잘 자라는 수경재배로
햇볕도 통풍도 물 주기도 습도 조절도 다 어렵다. 그렇다면 답은 수경재배? 그래서 국민식물 스킨답서스를 골랐다. (이제부터 식물에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한다) 실내에서도 환해 보이게 형광으로. 스킨답서스도 무늬가 다양하기로 유명한데 벵갈이가 있다 보니 너무 무늬종만 기르면 베란다가 어수선할까(?) 염려되었다. 세 번째는 더 빠르다. 꼬미가 오고 일주일 만에 결제! 하지만 중요한 것을 놓쳤다. 바로 식물을 수령하는 시기.
연휴 중간에 결제해서 끝나면 올 줄 알고 여행을 떠났는데 발 빠른 판매자분은 연휴에도 쉬지 않았다. 그래서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10월 초 황금연휴, 스킨답서스는 이틀을 뜨거운 햇살로 잘 데워진 종이 박스 속(의 비닐포장)에서 보냈다. 에라 모르겠다 스킨답서스는 원래 잘 산대-하고 열어본 박스. 다행히 살아 있었는데, 죽지 않아 고마운 수준으로 살아 있었다. 벵갈이와 꼬미 때와는 다르게 확연히 흐물흐물한 잎, 군데군데 접히고 꺾였으며 잎 끝이 갈색으로(아앗 또 갈색) 마른 친구도 있었다. 하루만 빨리 열었어도 달랐을지도 모르는데..
스킨답서스가 이제 우리 집에 온 지 한 달이 되어가는데, 아직 회복 중이다. 우선 새 잔뿌리가 나지 않고-여전히 잎에 힘이 없다. 처음 왔을 때와 거의 달라지지 않은 모습. 그동안 한 병에 모았다가, 두 병으로 나눠 하나는 황토 하이드로볼로 뿌리를 가렸다가, 다시 합치고 가장 약한 아이만 따로 뺀다든가 하는 여러 법석을 피웠다. 그런데 오늘 아침 한약을 먹다가 생각이 났다. 왜 우리 스킨답서스에게 영양제 줄 생각을 못했지? 내일은 수경재배 영양제를 사야겠다. 다음 달에는 제발 잔뿌리 하나라도 나기를 기원하며..
난초라니 조금 갑작스럽군요
몇 주간 숨 고르기 이후 갈색의 식집사에게 별안간 고난도 호접란이 이사 왔다. 선물로 들어왔는데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 부쩍 식물에 관심 갖는 나에게 남편이 운을 뗐다. 난이라니, 그것도 꽃 핀 난은 영화 속 권력자들이나 키우는 것 아니던가? 하지만 새 식물은 언제나 환영이죠. 얼씨구나 포장 비닐도 안 뜯은 화분을 들었는데 뭔가 이상하다. 꽃대 두 촉 중 하나가 사정없이 꺾였다. 언제부터 이랬어? 물어봐도 전혀 모른다. 배송받아 놓고 손도 안 댔을 테니, 오던 도중 손상으로 꺾인 듯한데 더 놀라운 건 이대로 싱싱하게 며칠째 버티고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모든 건 시작하면서 알아보는 거니까. 그날 저녁부터 유튜브로 호접란 영상만 10개 가까이 시청했다. 잘 관리하면 꽃을 3개월 이상 구경할 수 있단다. 원래는 집에 가져와 꺾인 꽃은 화병에 꽂고 꽃대는 새로 올라오도록 자를까 하다가, 꽃이 아직 싱싱해서 지지대로 목을 펴주었다. 이제 3일째인데 다행히 시드는 정황은 없다. 뿌리의 건조함을 체크하고자 장식 돌도 걷어냈다. 난초 영양제가 항시대기 중이니 언제든 기다려!
무늬종? 묻고 더블로 가
한 달 반의 갈색빛(초록이 아닌) 식집사 생활을 정산하는 계기. 당근으로 무늬싱고니움 1쌍을 데려오면서 오늘로 화분받침대-한때 남편이 자취하며 쓰던 선반-가 얼추 찼다. 다른 분들 보면 더 꽉 채우더라만 우선 이 정도로 만족한다.
몸에 비해 꽤 큰 잎사귀로 대품이 아니어도 존재감 있는 녀석. 화살촉, 혹은 날카로운 하트 같은 잎 모양도 마음에 들었다. 지지대를 세워 수형을 잡아 줄 수 있다는 점 또한 매력적이다. 요즘 플랜테리어의 근본식물인 몬스테라는 아직 커 보이고, 찢잎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 형광이의 찢어지고 접힌 잎이 떠올라서인지도 모른다.. 형광이가 새순이 나면 달라질지도.
한 번에 하나만 데려오는 게 나름의 원칙이라 다른 판매자의 싱고니움과 엄청 고민했는데, 이 분의 싱고니움 무늬가 정말 말도 못 하게 예뻐서 묻고 더블로 가기로 했다. 얼마 전 초밥롤을 사 오다가 브레이크를 밟으며 뒤엉킨 적이 있어서, 안전벨트도 착실하게 채워서 모셨다. 이름 안 짓기로 했는데 왠지 하양이 노랑이로 부르게 될 느낌. 우리 이번에는 갈색으로 변하지 말자..
식집사 한 달 반, 무엇이 달라졌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정말 진리이다. 카페를 가거나 어딘가에 방문하면 존재도 몰랐던 화분이 눈에 들어오고 대중적 식물은 제법 종류를 구분해 알은체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네가 있었네? 이제 손쉽게 느끼기 어려운 발견의 재미가 일상에 들어왔다. 언제부터인가 잊힌 감각이었는데.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면 커튼부터 걷고 식물 친구들을 확인하고, 푸른 잎과 그 무늬를 계속 멍하니 바라보곤 한다. 정말 시간이 잘 간다. 이러다 나중에 발전하면 야생화 구분하는 어르신이 되겠군 생각한다. 그분들도 새로운 발견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조금이나마 짐작이 된다. 그때가 기다려지기도 한다.
그리고 꼭 구매로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당근마켓으로 식물을 구경하는 시간이 늘었다. 인터넷 스토어는 판매상세페이지와 배송되는 식물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대품이나 희귀 식물 등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한 때 주로 찾을 요량이다. 반면 당근마켓의 식물 사진에는 시간과 정성, 그리고 생활감과 사랑이 깃들어 있다. 내가 그렇게 키워 보니 알겠다. 타인의 사랑을 지켜볼 수 있어 정겹다.
우선 한동안은 새 식물을 들이지 않을 예정이다. (마음은 그렇다) 그래서 요즘의 키워드는 ‘베란다 월동’. 호접란이 걱정되었는데 아직 크게 기온 떨어지는 날은 없고 꽃도 싱싱해서 조금 지켜보려 하고, 아까 저녁에 온습도계를 가져다 두고 온도가 얼마나 떨어지는지 계속 체크했다. 오는 친구들마다 몸살 앓고 시작해서인지 냉해만은 없게 잘 준비하려고 한다.
위시 리스트 : 보스턴고사리, 아스파라거스 나누스, 블랙로즈 동백나무, 디시디아 화이트버튼, 율마, 미니바오밥
+) 많은 분들이 읽어주셔서 조회수 1,000을 돌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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