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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봉희 Apr 24. 2018

호모 사피엔스의 멋진 신세계는 어디인가?

회사 사보 기고 글

* 혹 책 중에 ≪멋진 신세계≫, ≪사피엔스≫, ≪사람의 아버지≫, ≪스타터스≫를 읽으신 분은 함 읽어봐도 좋을 듯하다. 




<호모 사피엔스의 멋진 신세계는 어디인가?>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습니다.” 

소설 ≪멋진 신세계≫에 나오는 야만인 존의 말이다. 흔히 행복해질 권리만을 당연시해온, 그리고 오직 성공을 위한 서바이벌 게임에 열광하는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그는 부적응자이자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처럼 보일 것이다. 설령 행복의 의미가 사회마다 다르고, 자기 존재가 처한 처지마다 다르다는 걸 인정하더라도,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는 인간의 마음은 선뜻 와 닿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이 말을 하기 전에 했던 말을 들어보자.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우주의 모든 원소가 끊임없이 운동하며 공간을 떠돌듯이, 인간이 살아있다는 건 불확실성의 자유로운 방랑이다. 미래란 정해져 있지 않고, 알 수도 없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위험과 죄악마저도 기꺼이 우리 삶의 일부로 껴안을 수 있다. 인간의 신체가 자유롭게 방랑하지 못할 때는 오직 죽음뿐이다.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저자인 올더스 헉슬리는 존의 입을 빌려 인간의 존재 이유를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인간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     


≪멋진 신세계≫는 흔히 말하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우리가 한 번쯤 읽어봄 직한 대부분의 디스토피아 소설은 미래의 어느 시대를 가정한다. 재편된 권력 구조는 새로운 계급 갈등을 초래하고, 무소불위의 특정 개인이나 집단은 산업사회의 독재자들이 누린 것보다 더 짜임새 있는 통제 시스템을 구축한다. 과학기술과 문명은 지금보다 현저히 발달했지만, 사람들을 통제하거나 특권층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이용된다. 유전자가 조작되어 새로운 인간종이 출현하기도 하고, AI가 진화를 거듭함으로써 결국 인간을 지배한다. 대다수 인간은 모든 욕망과 본능,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유를 박탈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디스토피아가 그리는 미래는 암울하다. 


익히 알듯이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에서 파생된 말이다. 토머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만의 유토피아를 상상하곤 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상은 대개 현실, 즉 자신의 처지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노예 상태에서는 그 신분에서 벗어나길 바라고, 빈자는 맘 편히 먹을 한 끼 식량을 바란다. 신을 믿는 사람은 종교가 다양하게 인정받는 사회를, 권력에 탄압받는 사람은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바란다. 토머스 모어 또한 그런 사회를 바랐다. 그는 당시 유럽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와 부조리를 해결하려는 고민을 통해 신분의 차이가 없고, 부를 공동 소유하며, 합리적인 법과 제도가 다스리는 평등하고 행복한 공동체를 꿈꾸었다.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은 현재의 상실에 대한 반어적인 희망이다. 하지만 그런 사회는 영원히 올 것 같지 않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유토피아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점은 디스토피아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 존 스튜어트 밀이라는 사실이다. 1868년 영국 의회에서 정부의 아일랜드 억압 정책을 비판하면서 처음 사용했다. 그는 그 유명한 명저 ≪자유론≫의 저자이다. 그래서 그런가? 디스토피아는 궁극적으로 ‘자유’를 상실한 사회로 읽힌다. 안락함이나 시를 꿈꾸는 자유뿐만 아니라 죄악이나 위험마저도 원할 수 있는 자유 말이다. 하지만 ≪멋진 신세계≫의 디스토피아는 탄생에서 무덤까지 모든 삶을 통제당한다. 스스로 생각할 자유 또한 박탈당한다. 심지어 쾌락마저도 주입당한다. 신체와 정신의 완벽한 파놉티콘이다. 사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샴쌍둥이 같은 존재이다. 유토피아는 어쩌면 디스토피아를 가정한다. 디스토피아적 삶에서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꿈꾼다. 차이가 있다면, 유토피아는 평등이 실현되었을 때, 디스토피아는 자유가 박탈되었을 때, 우리 앞에 현실이 된다.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한 다음에 존은 상대의 말에 이렇게 답한다.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요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런 것들이란,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와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고생하는 권리와 이투성이가 되는 권리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아갈 권리와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와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할 권리’를 말한다. 한마디로 보통 사람으로 살 권리이다. 우리는 이 책을 읽고 잠시 방황하다가 마침내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른다. 자유가 없는 안락함과 불행할 수 있는 자유 중에서 무엇이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지. 대부분의 디스토피아 소설의 문법은 이것이다. 통제되고 억압받지만 그럭저럭 안락함을 제공받는 인간과 자유롭지만 이런저런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인간, 그리고 그들을 분리하는 계급 사회의 권력자들. 프랭크 파스콸레가 ≪블랙박스 사회≫에서 간파했듯이, 문명의 발전과 통제는 동전의 양면이 된 지 오래이다.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를 출간한 건 1932년이다. 그가 오래전에 경계했던 디스토피아가 지금 우리들의 삶과 닮아있다. 인간이 꿈꾸는 욕망의 끝은 결국 이러한 디스토피아인지도 모른다. 욕망은 때론 문명의 탈을 쓰기도 하고, 꿈의 씨앗으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사회 속에서 실현되는 방식은 결국 권력과 자본의 탐욕이다. 


사실 헉슬리가 그리는 ‘멋진 신세계’는 지금 우리가 사는 2018년이 아니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포드 기원 632년’이다. 여기서 포드는 우리가 익히 아는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를 가리키고, 그가 개발한 T형 모델이 대량생산된 1913년을 기원으로 따져도 지금보다 527년 후인 2545년이다. 소설 출간 시점으론 613년 후 미래다. 예를 들면 조선이 건국되기도 훨씬 전에 조선의 멸망과 일제강점기의 암울함을 예측해 그리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헉슬리는 자신이 그린 사회가 오지 않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오더라도 한참 후에 올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예측은 빗나갔다. 채 백 년도 되지 않아 그가 그린 디스토피아의 세계는 현실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유토피아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면, 디스토피아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문명이 진보할수록 유토피아의 존재 가능성은 더욱더 멀어졌고, 디스토피아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곳’이 되었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의 시대 구분을 ‘포드 기원’으로 명명한 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소설은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미래 사회를 암울하게 그리고 있다. ‘공유, 균등, 안정’이라는 표어를 내세우는 세계국가의 통제 속에 인간은 산업화 시대에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듯이, <인공부화 조건반사 양육소>에서 대량으로 생산된다. 수정실과 부화기를 거치면서, 하나의 난자에서 적게는 8명, 많게는 96명의 일란성 쌍둥이가 태어난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기 전에 이른바 계급예정실에서 자신의 사회계급으로 분류되어,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계급으로 나뉜다. 최하위 계급인 엡실론에게는 태아 상태에서 독소를 주입하거나 산소를 적게 공급함으로써 두뇌와 신체의 발달을 조절한다. 또한 여성 태아는 일부만 제외하고는 남성 호르몬을 투입해 불임으로 태어나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계급, 즉 피할 수 없는 사회적 숙명을 좋아하도록 만들기 위한 조건반사 양육을 받는다. 이 모든 과정에서 현대사회의 우리가 추구하는 인간적 가치는 사라졌다. 욕망과 감정들도 모두 말살되었다. 오로지 대량생산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대량생산의 원칙이 인간의 탄생, 즉 생물학에 적용된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저자가 왜 포드 기원을 적용했는지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포드주의’라는 생산 시스템의 발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산업혁명 후 대량생산의 기초는 마련되었지만, 대부분 가내 수공업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영화 <모던 타임즈>로 익숙한 공장형 대량생산, 컨베이어 벨트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노동자는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절차에 따라 늘 똑같은 작업만 반복하는 생산 시스템을 적용한 건 포드였다. 이 시스템은 생산성의 혁신을 가져 왔다. 다른 회사에 비해 대여섯 배의 생산량을 달성했다. 대신에 노동자들은 시간과 자유를 빼앗겼다. 화장실도 못가고 대화도, 담배도 금지되었다. 마치 시계 부품처럼 쳇바퀴 속에서 대량생산에 소모될 뿐이었다. 더 나아가 포드는 임금을 올려준다는 명분으로 노동자의 일상생활까지 통제했다. 결과적으로 포드주의는 노동자(인간) 통제 시스템이었던 셈이다. 기실 문명과 과학의 발달 정도가 다를 뿐 ≪멋진 신세계≫ 속 사회와 포드주의로 대표되는 20세기 초 미국 사회의 메커니즘은 비슷하다. 어쩌면 헉슬리는 젊은 시절에 이미 ≪멋진 신세계≫의 디스토피아를 포드를 통해 보았을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디스토피아     


우리는 가끔 “만약 지금의 기억을 가지고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는 이렇게 저렇게 살 거야” 같은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곤 한다. 어찌 보면 그런 상상이 미래소설의 출발점인지도 모르겠다. ≪스타터스≫는 그와 같은 욕망이 인간의 사악한 본성과 결합한 또 다른 디스토피아 이야기다. 



어느 미래 시대, 미국은 2년에 걸친 태평양 연안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치사율 100%의 치명적인 생물학 미사일이 미국을 강타한다. 노인과 아이들이 먼저 백신을 맞는 동안 청장년층은 모두 사망한다. 인류의 수명이 200세까지 확대된 시대에 노인(엔더)과 10대 이하의 청소년(스타터)만 남겨진 세상에서 모든 권력과 부는 노인들이 갖게 되고, 부모나 조부모가 없는 어린 고아들은 부랑아가 되어 숨어 살거나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집행관을 피해 거리를 전전하며 숨어 살던 주인공 캘리는 아픈 동생을 위해 결국 ‘바디 뱅크’를 찾아간다. 그곳은 늙은 엔더에게 스타터의 신체를 대여해주는 곳이다. 돈을 위해 몸을 판 10대들의 뇌에 신경칩을 삽입하고, 몸을 빌린 노인의 뇌에도 칩을 삽입한다. 두 정신은 컴퓨터를 통해 연결되고, 10대가 꿈을 꾸며 뇌 속에서 잠든 사이 늙은 엔더는 그 몸을 차지하고 신나게 젊음을 즐긴다. 일종의 살아 있는 의식의 윤회이다. 돈 많은 엔더들은 마치 옷을 갈아입듯 다양한 신체를 빌려 살 수 있다. 불법과 사악함이 만나면 늘 그렇듯, 고아를 납치해 젊은 신체를 영구 임차할 수도 있다.      


진화의 종말새로운 인간의 탄생     


2016년 출판계의 최고 히트 상품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였다. 이 책의 마지막 챕터의 제목은 <과학혁명>이고, 그 마지막 서브챕터는 공교롭게도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이다. 어딘지 앞에서 살펴본 디스토피아랑 닮아있다. 


종말은 40억 년 동안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의 진화에 작용한 자연선택 법칙이 깨지고, 지적설계 법칙이 이를 대체하면서 시작된다. 단, 지적설계자는 창조론자들이 말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것도 과학의 최첨단에서 연구하는 과학자들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 유전자 조작이 있다. 지금도 전 세계의 실험실에서 과학자들은 살아 있는 개체의 유전자를 조작해, 원래는 해당 종에게 없던 특성을 부여한다. 이는 명백히 자연선택 법칙의 위반이다. 브라질의 생물예술가인 에두아르도 카츠는 2000년에 프랑스의 연구소에 의뢰해, 평범한 흰 토끼의 배아에 녹색 형광을 발하는 해파리 유전자를 삽입해 ‘알바’라는 이름의 녹색 형광 토끼를 창조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현재의 기술은 3만 년 전에 멸종한 네안데르탈인(≪멋진 신세계≫의 엡실론 계급)을 부활시킬 수 있고, 우리보다 수명이 길고(≪스타터스≫의 엔더), 지적, 정서적 능력도 훨씬 뛰어난(≪멋진 신세계≫의 알파 계급) 호모 사피엔스도 창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언젠가는 그런 인간들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멋진 신세계≫의 <인공부화 조건반사 양육소>를 지구 곳곳에 세울 수도 있다. 그러면 그들은 더 이상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다. 



유전학을 필두로 한 생명공학 분야에서만 자연선택 법칙이 깨지고 있는 건 아니다. 생명의 법칙을 바꿀 수 있는 또 다른 기술은 바로 사이보그 공학이다. 사이보그는 생물과 무생물을 부분적으로 합친 존재이다. 현재도 인간의 손상된 신체를 보완하는 기술은 상당히 발전했다. 그것이 창조의 영역을 침범하면, 역시나 우리보다 더 똑똑하고 신체 능력도 뛰어난 새로운 인간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다. 일각에서는 반은 생물이고 반은 기계인 존재, 즉 트랜스휴머니스트의 출현을 준비하고 있다. ≪사람의 아버지≫의 저자인 칩 월터는 이를 ‘사이버 사피엔스Cyber Sapiens’라고 명명했다. 이 책 또한 진화론을 다룬 책이지만, ≪사피엔스≫와 마찬가지로 그 마지막은 ‘다음에 올 인간’에 할애하고 있다. 


칩 월터가 ≪사람의 아버지≫를 쓰게 된 질문은 이것이다. “700만 년 동안 진화한 27가지 인간종 중에서 왜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건장한 인간종이 아니라 가냘픈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남아 진화에 성공할 수 있었는가?” 결국 가장 약한 자가 최후의 승자가 된 진화의 역설인 셈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살아갈 해답의 힌트를 구할 순 없을까? “가냘픈 인간에게 생존의 희망을…”. 극도로 강해지려고만 하는 인간의 욕망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역설에 한 번쯤 귀를 기울이는 건 그래서 필요하다.    


  


가냘픈 인간을 위하여     


유발 하라리는 “미래 기술의 진정한 잠재력은 호모 사피엔스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단순히 수송 수단과 무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과 욕망까지 말이다”라고 말한다. 그 변화는 ‘영원히 젊은 사이보그’의 탄생을 예고한다. 번식할 필요도 없고, 성별도 없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정들은 무의미해진다. ≪스타터스≫의 늙은 엔더들처럼 굳이 젊은 사람의 몸을 임차할 필요도 없다.

 

또한 유발 하라리는 생명의 법칙을 바꾸는 제3의 방법은 완전한 무생물적 존재를 제작하는 것이라며, 컴퓨터 프로그램과 컴퓨터 바이러스를 예로 들었다. 2016년 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세기의 대결이 우리나라에서 열렸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이다. 그 과정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지만, 알파고가 치른 69경기 중 유일하게 패배를 안긴 이세돌이 찾은 신의 한 수로 뽑힌 ‘백 78’ 수는 0.007%의 확률을 뚫은 판단 끝에 나온 것이라고 한다. 언론들(그리고 현생 인류들)은 1만분의 1에 가까운 묘수를 인간의 직관으로 찾아낸 것이라고 흥분하며 떠들어댔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인공지능의 초기 버전(인공지능의 끝은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경지일지 모른다)을 상대로 바둑 한 판 이기는 데도 1만분의 1의 묘수를 찾아내야 한다.


사족을 달자면, 인공지능의 완성은 공감각이라고 생각한다. 시청각적 기능이나 연산 장치는 어려운 게 아니다. 가장 어려운 게 공감각이다. 공감각은 존재하는 감각과 존재하지 않는 감각의 합이다. 혹은 감각의 여백이다.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는 종소리를 시각화한 공감각의 대표선수다. 알파고는 인풋input만 주어진다면 무수히 많은 실재하는 종소리를 그 미세한 울림까지도 구별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은 푸른 종소리는 구별하지 못한다. AI가 그 여백을 채워 ‘푸른’의 의미를 이해하는 날, 그들은 인간이 된다. 그리고 일부 과학자의 예상처럼,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초지능을 얻어 자신보다 나은 AI를 스스로 만드는 지능 폭발이 일어나면, 그들은 인간을 대체한다.     


우리는 멋진 신세계를 꿈꾸며 열심히 일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세상은 유토피아처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남아 있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멋진 신세계≫는 제어하지 못한 문명의 신기루다. ≪스타터스≫는 욕망을 가장한 탐욕이다. 어쩌면 디스토피아 소설은 호모 사피엔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안정한 인간으로 살 것인가? 완벽하게 프로그래밍된 기계인간으로 살 것인가?” 우리는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이 혼재된 인간이다. 그러니 고집쟁이 농사꾼 전우익의 책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를 흉내 내면서 마무리해야겠다. “인간으로 못 살믄 무슨 재민겨?”     




* 추천(참고) 도서

- 멋진 신세계 / 올더스 헉슬리 지음 / 문예출판사(여러 출판사에서 출간됨)

- 사피엔스 / 유발 하라리 지음 / 김영사

- 스타터스 / 리사 프라이스 지음 / 황금가지

- 사람의 아버지 / 칩 월터 지음 / 어마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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