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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봉희 Nov 14. 2018

단 한 가지 속여도 되는 게 있다면...

바나나를 먹다가

젊은 시절; 대개의 사람들이 잘 먹고 좋아하는 것 중에 먹지 않은 것이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3yellow'라 명명했다. 카레, 바나나, 멍게였다. 먹거리 중 흐물흐물한 노란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카레는 무엇보다 향 때문이다. 

처음 그 향을 맡았을 때 이건 내가 상종할 음식이 아니라고 판정했다. 식당에서 제육볶음을 먹고 있는데, 누가 옆 테이블에서 카레를 시키면 나는 테이블을 옮겼다. 그 식당에서 카레로부터 가장 먼 자리로. 제일 곤혹스러울 때가 MT 갈 때였다. 어느 모임이나 꼭 한 끼는 간편하게 카레를 해먹었다. 그럴 때면 찌개나 다른 반찬을 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나는 고추장을 준비해서 남들이 노란 음식 먹을 때 빨간 음식을 먹었다.

     

바나나는 대학 와서 처음 먹었다. 

술집에서 과일안주에 나오는 작은 토막이었다. 그거 먹고 바로 설사를 했다. 당시만 해도 튼튼한 몸이라 술 마시다 그런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술 마시다 두 번째, 세 번째 그런 건, 마른안주로 나온 바나나 말린 것을 먹고나서였다. 그 후로는 날 것이든 말린 거든 바나나를 먹지 않았다.     


멍게는 내게 흐물흐물한 음식의 대명사였다. 

전주라는 내륙도시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했기에, 해산물을 먹을 기회가 많지도 않았고, 회라는 것도 대학 와서 먹은 아나고회가 처음이었다. 멍게를 파는 집에는 멍게 말고도 먹을 게 많았다. 흐물거리는 멍게보다는 딱딱한 해삼이 더 맛있기도 했다.      


이 중 먹기 시작한 건 멍게부터였다. 

그것도 몇 년 안 되었다. 먹어 보니 딱히 안 먹을 이유가 없었다. 입안을 refresh해주는 느낌이었다. 두 번째는 바나나다. 올해부터 먹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까지 먹은 것 다 합해봤자 반송이도 안 된다. 다행히 예전의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제 술 마시고 들어오니 거실에 바나나가 한 묶음 있었다. 

하나를 떼서 먹고 잤다. 그리고 아침에 식사 대용으로 하나를 또 먹었다. “바나나로 해장까지 하다니!” 스스로도 꽤 놀라운 일이라 몇 자 적는다. 


저 옛날 강진에서 유배 중이던 다산 선생은 “음식이란 목숨만 이어가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고기나 생선이라도 입안으로 들어가면 더러운 물건이 되어버린다”고 하면서, 맛없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방법을 이렇게 알려주었다. “(인간 세상에서) 단 한 가지 속여도 되는 게 있다면 그건 자기의 입과 입술이다. 아무리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생각하여 입과 입술을 속여서 먹고 잠깐만 지나면 배고픔이 사라져 주림을 면할 수 있다.” 물론 먹거리가 한정된 유배 생활의 고달픔에서 나온 달관이겠지만, 왠지 수긍이 간다. 어쩌면 나 또한 언제부터인가 속임수가 늘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흐르면 입맛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고, 속임수도 변한다. 다만 아직 카레를 먹기 위해 내 입을 속이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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