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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봉희 Oct 18. 2018

남명 조식; 합천 삼가의 뇌룡정과 용암서원을 다녀와서

여행지나 술자리에서의 두서없는 토막 잡썰(雜說) ⓶

2018.10.9, 합천 삼가면의 뇌룡정과 용암서원을 다녀왔다.


서울에서 과거 공부를 하던 남명 선생은 26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향인 이곳으로 와 장사지내고, 무덤 옆에서 3년간 여막살이를 한다. 이미 과거는 포기하기로 작심한 상태였기에, 인근 자굴산 암자에 들어가 자신만의 학문에 정진한다. (합천 삼가는 합천의 맨 아래 동네로 왼쪽으로는 산청과, 오른쪽으로는 의령과 접한다. 의령과의 경계에 자굴산이 있고, 자굴산을 넘어가면 퇴계의 처가 마을이기도 한 의령 가례마을이 있다. 남명과 퇴계는 1501년생으로 동갑이다. 굳이 따지면, 퇴계는 음력 11월생이니 양력으로는 1502년생이라고 한다. 하지만 요즘 식으로 ‘빠른 02’이니 둘을 동갑으로 엮는데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재밌는 건 당시 '좌퇴계 우남명'으로 불릴 만큼 경상도에 기반한 학맥의 양대 산맥이고, 남명의 생가(외가)와 퇴계의 처가가 자굴산을 두고 가까이 있었는데도 둘은 평생 얼굴을 마주친 일이 없다고 한다. 편지만 몇 번 주고 받고 만다. 이 얘기는 여기서 각설하자!)  



다시 남명 이야기. 하지만 일찍이 맹자가 설파한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을 남명도 피해갈 수 없었다. 외가 근처에서 어린 동생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는데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결국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산에서 내려온 남명은 가족을 데리고 처가인 경남 김해의 신어산 아래 마을로 이사한다. 
처가는 부유한 지방 사족이었다. 하여 김해에는 처가에서 아내가 물려받은 집과 논밭이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딸도 유산 상속에 균등하게 참여하였다. 익히 알듯이 퇴계의 재산도 집안에 들어온 여자(어머니, 아내, 며느리)가 상속받은 재산이 상당했다. 이러한 상속 문화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건 임진왜란 전후이다. 이 얘기도 하자면 길어지니 여기서 각설하자. 여튼 임진왜란 전후로 상속에 있어서도 요즘 경제학식으로 표현하면, 선택과 집중이 이루어져 장자 상속이 자리를 잡게 된다는 것쯤으만 알고 있으면 될 듯....


김해 신어산 아래에 산해정을 짓고 공부하며 제자를 양성하고 살던 남명의 삶에 변화가 생긴 건 역시나 죽음이었다. 44살 때는 외아들 차산이 9살의 나이로 죽더니, 다음해인 45살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뜬다. 아버지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남명은 어머니를 모시고 와 아버지 곁에 장사지내고 3년간 여막살이를 한다.


여막살이가 끝나자 남명은 새로운 결심을 한다. 고향인 합천 삼가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로 한 것이다. 이때 남명은 재밌는(?) 결심을 한다. 김해에는 입에 풀칠할 땅이라도 있지만 고향으로 가면 먹고 살 일부터 우선 걱정이었다. 그렇다 보니 남명은 자신을 따라 고향에 함께 가도 좋고, 김해에 계속 머무르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좋다며, 아내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남명은 아내에게 굳이 함께 가자고 강요하지 않았다. 결국 아내는 김해에 남겠다고 해 남명 혼자 고향으로 옮겼다. 남명의 나이 48살쯤이었다. 이로써 남명의 김해 시절이 끝나고 고향인 합천 삼가의 시절이 시작되었다. 물론 당시 양반의 삶이 그렀듯, 삼가에서 혼자 독수공방한 건 아니었다. 부실(첩)과 함께 살면서 3남 1녀의 자녀도 낳는다.


그렇게 고향으로 와서 지은 게 뇌룡사와 계부당이었다. 뇌룡사는 1900년대 초에 중건되면서 이름이 뇌룡정으로 바뀌었고, 계부당은 없어진 후 중건되지 않았다. 남명은 환갑 때 산청의 산천재로 옮기기 전까지 이곳에서 산다.



아래 사진, 마당이 넓은 건물이 용암서원이다. 남명이 죽고 4년 뒤인 1576년에 삼가의 유림들이 힘을 모아 회산서원을 세웠고, 광해군 때 사액을 받아 용암서원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남명을 배향한 다른 서원과 마찬가지로 흥선대원군 때 사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2007년에 복원되었다.



아래 사진의 큰 하얀 돌은 남명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그 유명한 '을묘사직소'를 새겨놓은 것이다. 이는 1555년에 임금이 남명을 단성현감에 제수하자, 작심하고 올린 사직 상소문이다. 그래서 '단성소'라고도 부른다. 이 상소가 유명해진 구절은 역시나 당시 임금인 명종을 고아에 비유하고, 그 어머니인 문정왕후를 과부에 비유한 내용이다. 즉 "대비께서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 하나 깊은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아직 어리니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고 말한 것이다. 명종이야 그렇다 쳐도 문정왕후가 누구인가. 지금이야 태릉에 묻혀 갈비 냄새 맡고 조용히 누워있지만, 당시만 해도 바로 드라마 <여인천하>의 주인공이 아니던가. 당시는 을사사화가 일어난 지 10년이 지난 시점이지만, 역시나 문정왕후가 동생인 윤원형과 함께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시기였으니,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작심한 듯 뱉은 발언이었다. 물론 명종은 노발대발 화를 냈다고 하나, 이 일로 남명이 죽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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