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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봉희 Oct 19. 2018

부음정(孚飮亭)에서 내암 정인홍을 변명하다.

여행지나 술자리에서의 두서없는 토막 잡썰(雜說) ⓷

2018.10.9, 합천 가야면 부음정(孚飮亭)에서 내암 정인홍을 변명하다.





흔히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 언급되는 사람이 두 명 있다. 바로 수우당 최영경과 내암 정인홍이다. 이 중 기질과 풍모 면에서 남명을 빼닮았던 최영경은 1589년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먼저 죽음을 맞게 된다.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 당시 사건의 중심인물로 길삼봉이란 가상의 인물이 지목되었는데, 그가 바로 진주에 사는 최영경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그는 결국 이듬해 체포돼 진주 감옥에 갇힌 후 석방되었다가 재차 국문을 당하고 죽는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 남명의 제자들이 권력의 주축이 된 광해군 정권에서 북인의 좌장 역할을 한 사람은 정인홍이다.(아시다시피 동서붕당이 일어났을 때 남명과 퇴계의 제자들은 대부분 동인에 가담했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동인이 큰 희생을 치른다. 이후 당시 옥사의 위관이었던 서인의 정철에 대한 처벌 문제로 퇴계 제자들은 남인(온건파)으로, 남명 제자들은 북인(강경파)으로 갈린다).


그러나 정인홍은 인조반정 후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한다. 그의 나이 89살이었다. 당시 정승을 지냈거나 80살이 넘는 고령의 인사는 참수하지 않는 관례를 깨고 서인 세력은 그를 처형한다. 굳이 그렇게 한 이유는 뭘까? 그가 그토록 서인의 미움을 받은 사건 중 눈에 띄는 것은 두 가지이다.


정인홍은 광해군 2년(1610), 스승인 남명은 배제한 채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새로이 문묘에 모시자는 여론이 있을 때,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종사는 부당하다고 반대하였다. 이유인즉 이렇다. 윤원형이 누이인 문정왕후를 등에 없고 권력을 행사하고 있을 때, 명종의 후사가 없자 계림군 등 주요 왕자들을 죽이기 시작한다. 경쟁자들의 싹을 자른 것이다. 그중 하나가 봉성군 이완이다. 윤원형은 1547년에 양재역 벽서 사건을 꾸며 봉성군을 죽인다. 그런데 이때 조정 대신들에게 모두 서명을 받아서 처리했다고 한다. 당시 벼슬에 있던 이황과 이언적도 서명을 한 것이다. 이 일은 퇴계 스스로도 후회하는 일이라고 하는데, 정인홍은 이 일을 들어 두 사람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것이다. 문묘 종사는 당시 조선 성릭학자들에게는 최고의 영광이었다. 그런데 정인홍이 자신들의 스승인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니, 이황의 제자들에게는 원수나 다름 없을 것이다. 이들이 중심이 된 성균관 유생들은 성균관에 비치된 유생 명부인 청금록(靑衿錄)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광해군 시절 북인 세력의 영원한 아킬레스건이 되는 일명 ‘폐모살제(廢母殺弟)’, 즉 1613년 영창대군의 죽음과 1618년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 사건에 그의 이름도 연루된다. 결과적으로 정인홍은 이 두 사건을 모두 반대했던 것이 정설이다. 광해군과 이이첨의 서슬 퍼런 칼날이 춤추고 있을 때라 종실에서만도 130명이 인목대비 폐모론에 참여했다. 하지만 정인홍은 폐모론에 반대했다. 스스로도 폐모론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일설에는 폐모 논의가 한창일 때 합천에 머물던 정인홍이 폐모론에 반대하는 편지를 써 이이첨에 전달했는데, 도중에 심부름꾼이 편지 내용을 찬성으로 바꿔치기 했다고도 한다. 어찌 되었든 당시 서인들은 눈엣가시 같았던 정인홍을 처형하기 위해 89살의 노구인 그에게 폐모살제의 죄목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죄목을 씌웠다. 그중에는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죄목도 있었다.(나는 이 죄목만으로도 인조반정 주축 세력들의 정신 상태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후 조선은 서인과 일부 남인의 역사가 계속되므로, 결과적으로 ‘폐모살제’라는 죄목은 조선시대 내내 당사자에게는 주홍글씨가 된다. 그나마 정인홍은 조선의 끝자락인 순종 때 복권되지만, 우리가 익히 하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조선이 망할 때까지도 유일하게 복권되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 ‘폐모살제’라는 주홍글씨가 크게 작용한다.



어쩌면 정인홍은 지금까지도 실질적인 복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후세 사람들에게 은연중 정인홍은 권신이나 간신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드라마 등에서 조선 중기의 대표적 권신으로 평가받는 이이첨과 묶여서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광해군 정권의 일인자로 행세한 이이첨은 사실 그의 제자였다. 개인적으로는 이이첨이 자신의 권력 기반을 위해 정인홍의 학식과 덕망, 허균의 문장과 영민함을 끌어들여 이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인홍은 이이첨과 싸잡아서 평가받아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정인홍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인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전란 중에 팔만대장경판이 온전히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은 지역 의병장들의 공을 무시할 수 없다(당시 경상도에서 활약한 의병장 중 상당수는 남명의 제자들이었다. 최초의 의병장으로 기록된 곽재우를 포함하여 정인홍, 김면 등 약 50명의 의병장이 그의 제자였다. 이는 실천을 중시한 남명의 경의사상에 기인한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학계의 평가다).


그는 스승인 남명처럼 산림처사의 삶을 살고자 했다. 스승의 문집인 『남명집』의 편찬을 주도한 것도 그였다. 또한 광해군은 정인홍이 합천에서 올라오기를 기다려 영의정 자리를 7년 동안 비워둔 적도 있었다고 하고, 단재 신채호는 한국 역사상 삼걸(三傑)로 을지문덕, 이순신, 정인홍을 꼽음으로써 그를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가라고 했다.



정인홍은 스승인 남명의 임종을 곁에서 지켰다. 남명을 상징하는 두 가지 물건이 있다. 바로 경의검과 성성자이다. 경의검은 칼이고, 성성자는 두 개짜리 방울인데, 남명은 평생 이 두 가지를 몸에 지니고 살며 학문과 자기 수행의 징표로 삼아왔다. 남명은 임종에 이르러 정인홍에게 학자로서의 의리와 결단의 징표였던 자신의 칼인 경의검을 물려주었다한다).


 ‘부음(孚飮)’은 『주역』의 ‘유부우음주(有孚于飮酒)라는 문장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부음정에 다녀온 김에 그를 위한 변명을 몇 자 적는다.


p.s 그 동안 여러 곳의 정자나 서원 등 옛 성현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를 다녀봤지만, 그중 부음정의 관리가 제일 안 되고 있는 듯하다. 부음정은 거미줄과 먼지와 잡초와 쓰레기가 방문객을 맞고 있었다. 근처에 다 가도록 이정표도 눈에 안 띈다. 근처에 있는 해인사나 대장경기록문화테마파크에 밀려서일까? 후세 사람들에게 잊혀진 그의 이름만큼이나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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