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나 술자리에서의 두서없는 토막 잡썰(雜說) ⓹
추위가 한풀 꺾이고 봄이 기지개를 켤 무렵이면, 사람들은 동백꽃을 찾는다.
동백은 몽우리를 맺기 시작할 때부터 꽃이 다 떨어질 때까지 계속 사람들의 발길을 끄는 나무다. 동백의 낙화만큼 처연하다는 표현에 어울리는 꽃이 또 있을까. 나는 지금도 강진 백련사에서 처음 보았던 동백의 낙화를 잊지 못한다.
동백(冬柏, 冬栢)은 글자 그대로 겨울에 꽃이 피는 나무라는 의미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자생하는 동양의 꽃나무다.
동백은 문학작품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절정의 순간에 톡 떨어지는 꽃처럼 흔히 이루지 못한 사랑의 상징으로 많이 쓰였다. 서정주의 시 〈선운사 동구〉가 그렇고, 프랑스 소설가 뒤마의 소설 『춘희(La Dame aux camlias)』가 그렇다. 이 소설의 원제는 『동백(꽃) 부인』이지만, 일본에서 『춘희(椿姬)』라고 번역한 것을 가져왔기에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일본에서 가져온 건 그럴 수 있다 쳐도, 문제는 잘못 가져왔다는 점이다. 춘희의 ‘춘(椿)’은 우리에겐 동백이 아니라 참죽나무를 의미한다. 동백은 빨간 꽃이 피지만 참죽나무의 꽃은 하얀색이다. 베르디는 이 소설을 각색하여 오페라 〈라트라비아타〉를 만들었는데, 오페라의 여주인공이 가슴 위에 빨간 동백꽃이 아닌 다른 종류의 꽃을 달고 나오면 엄밀히 말해 원전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참고로 강원도를 비롯하여 일부 내륙 지역에서는 생강나무를 동백이라고 부른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은 실제는 생강나무꽃이다. 동백은 실생활에서 기름으로 많이 쓰였다. 그런데 간혹 따뜻한 서해 난류를 따라 북쪽 지역인 대청도에서도 자라지만, 일반적인 북방한계선은 충청도 남쪽(춘장대 일대)이라 강원도의 야생에서는 동백이 자랄 수 없었다. 옛날에는 동백기름이 귀했다. 그래서 생강나무 씨에서 기름을 얻고 이를 동백이라 불렀던 것이다. 더 엄밀히 말하면 원래는 ‘개동백’이라 불렀다. ‘개’는 흔히 ‘비슷하거나 가짜’일 때 붙이는 접두어다. 그러니 누가 자신이 쓰는 기름에 가짜라는 딱지를 대놓고 붙이고 싶었겠는가. 어느 순간부터 접두어 ‘개’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소설의 동백꽃이 생강나무꽃이라는 증거는 소설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생강나무는 봄에 노란 꽃을 피운다.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고 했던 것이다. 실제 동백은 대개 빨간 꽃이고, 간혹 하얀 꽃이 있을 뿐이다. 또한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소설의 주인공은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고 했는데, 이는 생강나무의 꽃향기를 표현한 문장이다. 겨울의 동백꽃은 향기가 없다.
생강나무꽃은 멀리서 보면 산수유꽃과 구별이 잘 안 된다.
피는 시기도 비슷하다. 하지만 가까이 가면 구별이 그리 어렵지 않다. 산수유는 꽃이 왕관처럼 깔끔하게 피지만, 생강나무는 마치 갈대처럼 정돈이 안 된 모양으로 핀다. 정 구별이 힘들 걸랑 가지를 잘라보면 안다. 생강나무는 실제 생강 냄새가 난다. 또 아주 단순하게 짐작하는 방법도 있다. 산중턱을 기준으로 위쪽에 있으면 생강나무, 아래쪽에 마을 가까이 있으면 산수유라고 보면 얼추 들어맞는다.
동백은 차나뭇과에 속한다.
다산은 혜장을 만나러 백련사에 가면 동백나무 숲 아래에서 차도 마시고 이야기꽃도 피웠을 것이다.
동백의 낙화를 보고 다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절정의 순간에 속절없이 톡 떨어진 꽃들이 마치 자기의 인생과 닮았다고 느끼진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