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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봉희 May 07. 2019

삭발과 단발령

남는 건 사진뿐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두발자유화라는 이름으로 머리 길이가 어느 정도는 허용되던 시기였다. 

그래도 학교마다, 선생님마다 여차하면 머리를 단속하는 문화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자유화’에 충실한 학생이었다. 여간해선 머리를 깎지 않았다. 깎더라도 내 귀가 밖으로 노출된 적이 없었다. 타고난 머리통도 큰데다, 당시엔 머리숱도 많았던 시절이니, 지금 생각하면 참 가관이었던 시절이다. 


문제는 교련 시간이었다. 

유일하게 내 머리를 가지고 시비를 건 선생님은 교련 선생님밖에 없었다. 나는 다른 친구들이 교련 훈련을 받는 동안 운동장 한가운데에 혼자 서 있었다. 한 시간 내내 차렷 자세로 서 있으라는 벌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은 나를 교무실로 데려가 담임에게 넘겼다. 학기가 끝날 때까지 반복된 풍경이었다. 선생님이 아무리 깎으라고 해도 나는 깎지 않았다. 당연히 교련 점수는 최하였다. ‘가’로 깔렸다. 그 당시 옆 반 친구들 예닐곱 명이 삭발을 했다. 그때 내 심정은 “바보들, 안 깎으면 되지 왜 삭발을 해?”였다. 그 친구들은 열라 몽둥이찜질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항한다고. 나는 성적만 최하로 깔렸을 뿐이다. ‘자유화’의 시절에 머리를 깎지 않는 건 단순 저항이었을 뿐 반항은 아니었나 보다.  


요즘 간간이 삭발 소식이 들린다. 그들은 저항일까, 반항일까. 
사실 궁금하진 않다. 그냥 “재들도 머리를 삭발하는구나” 정도의 감상평뿐. 그냥 “저항이면 다음 선거에서 성적을 최하로 깔고, 반항이면 몽둥이찜질이 필요하지 않을까” 정도의 감상평뿐...


우리 역사에서 머리카락이 가장 큰 이슈가 된 건 단발령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민비를 죽인 후 들어선 친일 성향의 김홍집 내각이 내건 을미개혁 중 하나가 단발령이었다. “머리카락을 자르려거든 차라리 내 목을 베라”는 항의가 넘치던 시절이니 당시의 단발령 반대는 지금의 삭발과는 차원이 달랐을 것이다. 단발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할 자리는 아니니, 여담 삼아 한마디만 하고 마무리해야겠다. 


단발령으로 가장 호황을 누린 가게는 사진관이었다. 

머리를 깎기 전 모습을 찍어 남겨두기 위해 사람들이 몰렸다고 한다. 지금 삭발하는 사람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진일 터이다. 고이 담아가 다음 총선 때 써먹어야 하니 말이다. 
어떤 사업이 호황을 누리면 반대로 망하는 사업도 있기 마련이다. 사진관이 호황을 누릴 때 망해간 사람들은 갓을 만드는 수공업자였다. 상투가 잘려나갔으니 그에 맞춰 만들던 갓도 소용이 없게 된 것이다.


그것이 저항이든, 반항이든 예전의 삭발 투쟁은 해볼 게 별로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몸부림 혹은 울분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머리카락만 속절없이 잘려나갈 뿐 사실 다른 영역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담보를 잡을 만한 권력도 없었다. 그러나 거대 권력을 가진 집단의 단체 삭발에는 갓 만드는 수공업자와 같은 수많은 백성들의 삶이 줄줄이 담보로 엮여 있다. 그들이 사진을 찍어가 다음 선거에 다시 당선이 되더라도, 누군가는 계속 갓이든 뭐든 만들어 먹고 살아야 한다. 내가 그들의 삭발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이다. 더구나 그 사진들에서 어떤 울분도, 타인에 대한 작은 보리심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다시 30여 년 전 감흥이 살아났다. "바보들, 왜 삭발을 해?"


p.s 옆 반 친구들의 삭발은 나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우리 반에서도 담임선생님이 공개적으로 머리 단속을 시작했다. 물론 나는 졸업할 때까지 머리를 깎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저항도 반항도 아닌 그냥 어릴 적 고집일 뿐이었다. 어딘가 찾아보면 나도 그때 찍은 사진이 있을 것이다. 내가 머리를 깎은 건 군대를 가면서이다. 군대는 두발자유화가 아니었다. 지금은 머리가 귀를 덮을라치면 머리를 깎는다. 나도 세상도 변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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