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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봉희 Apr 17. 2019

등번호 42번, 그리고 난민 단상

내가 난민을 바라보는 입장의 출발점

나는 취미로 하는 스포츠 동호회에서 운동복을 맞출 때마다 등번호로 42번을 사용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생일이 4월 2일이었다. ‘사이’, 어감도 나쁘지 않아 늘 그 번호를 썼다. 회사에 다닐 때도 그랬다. 입사 전부터 있었던 축구 동호회에서도, 입사 후에 맘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만든 야구와 농구 동호회를 할 때도 42번이었다.


미국 프로야구에서 42번 등번호가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걸 안 건 한참 후였다. 

미국에서 4월 15일은 메이저리그의 모든 선수뿐 아니라 심판도 42번을 입고 경기를 한다. 42번은 영구 결번이다. 흑인 선수 출전이 금지된 지 60년 만에 등장한 첫 흑인 선수인 재키 로빈슨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이날은 1947년에 그가 메이저리그에 첫 출전을 한 날이다. 흑인 차별이 극심했던 시대에 그의 출전 자체만으로도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당시 미국은 당연한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였다.  

인류의 역사는 이주의 역사였다. 그 추동력은 생존이었다. 인류는 생존을 위해 바다를 건너고 높은 산을 넘었다. 이는 생명체에게 새겨진 본능이었다. 그 출발지는 역설적이게도 아프리카였다. 이는 인류가 진화하고 사회가 발전해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으로 건너간 유럽인들도 그 시작은 생존을 위한 이주였다.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 미국으로 이주한 것은 종교 박해를 피한 생존 선택이었다. 이러한 생존을 위한 이주를 약탈을 위한 침략과 원주민에 대한 차별의 역사로 바꾼 건 유럽과 미국이었다.


국가 간에 현대의 국경선이 확정된 이후 생존을 위한 이주의 본능은 무수한 심사를 받게 되었다. 

여러 조건을 충족시키고 깐깐한 심사를 거쳐야 비로소 국경선 너머로 이주가 허용되었다. 이제는 오래전 인류가 먹을 것과 살만한 기후를 찾아, 고난의 여정이지만 그래도 자유롭게, 산과 물을 건너던 시대는 끝났다. 대신에 눈에 보이지도 않은 자본만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시대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지구의 모든 땅이 생존 걱정 안 해도 되는 환경으로 바뀐 건 아니었다. 아직도 지구 곳곳에서 자연적, 문화적, 정치적 이유로 생존을 위협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기에 그나마 현명한 인류들이 만들어 놓은 숨구멍이 바로 난민이었다(물론 이곳에도 심사가 기다리고 있지만).


찬성과 반대는 세상의 모든 일에 존재한다. 

난민을 대하는 입장도 마찬가지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냐?”는 사람들이 있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칠 거”냐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전자의 입장이지만, 후자의 걱정도 일견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다만 생존을 찾아 이주한 사람들을 난민이라 한다면, 좀 과장되게 말해 지구에 살고 있는 인류는 모두 난민의 후예이다. 그리고 이주는 기본적으로 적응을 필요로 한다. 초기 인류의 이주라고 해서 늘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다. 새로운 기후와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자신들보다 강한 동물을 만날 수도 있었다. 더구나 어느 순간에는 자신들과 비슷한 인간종을 만나 경쟁해야 했다. 사회와 문화가 발전하고 복잡해질수록 적응해야 할 것도 그만큼 많아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생기는 부작용 또한 인류가 감당해야 할 부산물이다.


백 퍼센트 찬성이나 반대가 없듯이, 리스크 제로 또한 없는 게 인간의 삶이다. 

또한 모든 적응은 기존 거주자와 새 이주자 쌍방 간에 일어난다. 이주자도 적응해야 하지만, 거주자도 적응해야 한다. 이 경우 쌍방 간의 반목으로 리스크가 극대화되기도 하지만, 공감과 이해를 통해 공생을 모색하기도 한다. 어떤 방식을 먼저 시도해보는 게 좋을까? 미국에 이주한 조상 대대로 차별받는 이주자였었을 재키 로빈슨은 적응을 통해 기존 거주자들을 변화시켰다. 공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결과 미국은 당연한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로 조금씩 이동했다. 인간은 그렇게 이주와 적응의 반복을 통해 진화해나간다. 이것이 내가 난민을 바라보는 입장의 출발점이다.


P.S 나는 한때 난민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6개월 간 불법체류자로 산 적이 있었다. 

캐나다는 6개월은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다. 4개월이 지났을 때 캐나다 당국에 6개월 비자 연장 신청을 했다. 미리미리 신청해야 한다고 해서 일찍 신청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처리 결과는 오지 않았다. 6개월 기간이 만료되었는데도 오지 않았다. 걱정하는 나에게 네덜란드 이민자 출신인 주인집 할머니는 캐나다는 원래 처리가 늦다고 하면서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영사관을 찾아가 문의해도 해법은 없었다. 결국 나는 6개월을 불법체류하다 1년 만에 돌아왔다. 그 6개월 동안 나는 누가 시비 걸지 않는데도 어쩔 수 없이 심리적 약자로 살아야 했다. 괜히 내가 더 조심하고 괜히 더 착하게 살았다. 우연일 테지만, 인천공항 입국 후 핸드폰을 켜니 캐나다 정부로부터 연장 신청을 처리했다는 메일이 와 있었다. 8개월 만에 받은 승인, 마치 내가 출국행 비행기를 탄지 알았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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