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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Mar 01. 2023

기독어대백과사전

묵상지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13년 7월호 기고문

나의 남편 장군은 소프트웨어 개발자고, 가장 가까운 친구 L은 디자이너다. 가끔씩 그들이 일 때문에 다른 이들과 하는 통화를 듣거나 대화 중 요새 하는 일을 설명해 줄 때면, 내 머릿속을 채우는 단어는 ‘외계어’다. 두 사람을 안 지 십삼 년, 눈빛만 봐도 기분을 아는 그들을 그 순간만큼은 이해할 수가 없다. 조사 동사를 제외하면 내게 그네들의 오묘한 말은 개발자의, 디자이너의 독특한 ‘방언’ 이다. 


 그런데 내게 비슷한 표정을 짓는 친구 A가 있었다. 예수를 믿지는 않았지만 생각이 잘 맞아 곧잘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곤 하던 그는 내가 구사하는 ‘기독교적 방언’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한 사람이었다. ‘권면했다’는 말처럼 옛 번역에서 온 말부터, ‘내려 놓는다’ 등 비교적 현대(?)에 발생한 표현까지 내가 무의식적으로 써 온 말들에 대해 그는 종종 ‘그게 무슨 뜻이야?’ 하거나 ‘그런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하고 되묻곤 했다. 언젠가는 ‘기도해 보고...’ 하는 말 끝에 ‘그건 깊이 고민하는 거하고는 달라?’ 하는 도전(?)을 해 오기도 했다. 


그 덕분에, 한동안은 가급적이면 종교적인 용어를 덜 쓰고 뜻을 전하고자 노력했다. 특히나 믿지 않는 친구들과 대화 중 특정한 단어가 아니면 설명되지 않을 때는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거야’하는 부연을 덧붙였다. 그러자 보통 사람들의 언어와 크리스찬의 언어 사이에 꽤 큰 간극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전 교회에서 소식지 편집팀으로 일하며, 특별 기획으로 ‘기독교 언어’를 다루자며 각자 한 번쯤 의구심을 가져본 표현들을 늘어 놓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이러다 우리가 ‘바깥’과 제대로 소통하기 위해선 ‘기독어 대백과사전’의 편찬이 필요해지는 게 아닐까? 


이런 순간도 있다. 간혹 ‘연약함’이라는 말에는 담백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는 다른, ‘마음이 어렵다’고 할 때는 ‘섭섭했다’거나 ‘화가 났다’고 솔직히 터놓고 고백하는 것과는 다른, ‘내려놓았다’고 할 때는 상황을 담담히 설명하는 것과는 교묘히 다른 뉘앙스가 덧입혀지는 느낌이 든다. 심한 경우 종교적인 수사로 점철된 대화를 하다 보면, 가끔은 갑옷 두른 상대와 이야기하는 듯 답답할 때도 있다. 


때로는 그런 종교적 용어가 본질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성품과 하신 일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의 풍성함이, 거룩하고 고상하고 제한된 언어 속에 갇혀 불통 상태는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아니, 소통을 차치하고라도, 익숙한 말의 나열이 아닌 ‘내 말’로 복음을 설명하고 내 하나님을 고유하게 표현하고자 애쓰는 노력 또한 ‘새 노래로 찬양하라’는 권면에 대한 마땅한 응답이 될 것이다. 


 “나 은혜 받은 것 같아” 


얼마 전 드디어, A 가 회심을 했다. 그 감격스러운 이야기 속에서, 나는 그가 마치 처음 외국어를 배운 사람처럼 꼭 틀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꼭 들어맞지도 않게 구사하는 말들에 엄청 웃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하고 그가 했던 질문들을 돌려주며 놀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부디 그가 새로 배운 그 언어가 말로 신실한 척하는 스킬이 되지 않기를, A의 표현을 좁히거나 제한하지 않고 더욱 다채롭게 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새삼 생각했다. 오늘 나의 언어는, 어제보다 더 풍성하고 진실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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