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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Mar 01. 2023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

묵상지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13년 6월호 기고문

이직을 준비하던 중 생각처럼 일이 풀리지 않던 A는 오랜 교회 선배 B를 찾았다. 안정적인 자리를 박차고 나와 창업해 몇 년째 고군분투하고 있는 B 형에게라면 답답한 상황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게다. 몇 차례의 만남 끝에 A는 B가 운영하는 작은 회사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하던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으므로 몇 개월간은 집중적인 교육이 필요했다. 가르치려면 기존 인력의 집중력도 떨어지고, 급여는 급여대로 한 사람분이 늘어나니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B가 기꺼이 부담을 감내해 주었다. A는 열심히 배워서 자신이 회사에 기여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간만이라도, 구직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A가 B에게 이야기를 청했다. 자신을 떨어뜨렸던 어느 회사에서 다시 연락이 왔고 일주일 후부터 바로 출근이라고 했다. 고맙고 미안하지만 이해해 주리라 생각한다며, “모든 것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였다고, B 형을 믿으니 ‘솔직하게’ 그 간의 일들을 간증(?)했다. 알고 보니 두 달간 그는 구직 활동을 쉰 적이 없었다. 그 사이 B에게 받은 월급으로 생계가 위태로운 상황도 모면했고, 덕분에 급여 명세를 증명할 수 있어 은행 전세 대출을 무사히 받아 이사를 할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이 생각지 못한 하나님의 채우심이었다. 


그 둘 사이의 일을 가까이서 지켜본 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역시 B의 친구인 나는 마음이 답답하고 먹먹해져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애먼 하나님께 삿대질을 하며 대들었다. 어려운 중에 더 어려운 이에게 호의를 베푼 그를 하나님 왜 이용(?)하셨습니까. 스타트업의 리더로 몇 년째 고군분투하는 B가 겪은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개중 그가 꼽는 가장 큰 어려움은 ‘사람’이었다. 크고 작게 끊임없이 겪게 되는 사람들의 무심함과 배려 없음. 


A가 그저 담백한 사과를 했다면 어땠을까? 형이 마음 써 주었는데 앞으로를 생각하니 진로가 많이 고민되었다, 예상과 달리 이렇게 빨리 그만 두게 되어 미안하다... 고 했다면. 자신의 결정이 폐를 끼쳤을 수 있다는 생각은 못한 채 설레는 얼굴로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를 갖다 붙이지 않았다면, B의 낙심이 지금보다는 좀 덜했으리라. 


마치 평행 우주를 사는 것처럼, 주변과는 너무 상관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젖어드는 사람들을 본다. 사업의 실패와 무책임한 마무리로 오랜 세월 가족들을 고생시켜 놓고 “너희를 훈련시키신 하나님께 감사”하다시는 부모님, 처세를 위해 같이 일하던 동료들에게 끝까지 거짓말을 하고 이직하면서도 별다른 가책 없이 소그룹에서 그 인도하심만을 자랑하는 직장인, 피해자에게 한 번의 직접적 사과도 없이 하나님의 용서에 감사하며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있냐’고 설교하는 성추행범 목사, 아멘 하는 성도들. 


몇 해 전의 영화 ‘밀양’은 그런 이기적인 은혜의 끝을 그렸다. 홀로 용서 받고 피해자를 긍휼히 여기며 함께 하나님의 사랑에 거하길 기도하겠다는 가해자의 평온한 얼굴은, 어딘지 익숙해서 몹시 불편했다. 때로는 모든 종교적 용어를 거둬내고 내 내면과 상황을 톺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마디마다 눈물로 고백하는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가, 혹 내가 지나온 자리를 초토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좀 더 사려깊게 살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나와 내 가족 뿐 아니라 내 주변과 세계를 위해 기도하며 살고 있다면, 그것이 응당 주실 마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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