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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Mar 01. 2023

당연한 것은 없다

묵상지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13년 5월호 기고문

- 하나, 둘, 셋, 넷… 아직이야? … 여덟, 아홉? 아직?! 

- 대박, 절반이 사라졌네. 


변기 뚜껑을 열고 물을 붓는 장군을 채근하자 그가 답했다. 세상에, 시원하게 변기 한 번을 내리기 위해 자그마치 열 바가지의 물이 필요하다니.. 동티모르에서라면 샤워도 너끈히, 설거지는 몇 번을 했을 텐데. 본의 아니게 고작 두 사람이 사는 데 얼마나 물을 많이 쓰는지 매일 실감하는 중이다. 


지난 여름, 상황을 기회 삼아 도시를 벗어나 보자며 이사를 했다. 행정 구역은 신도시지만 이웃은 다섯 집이 전부이고 집 앞 모퉁이를 돌면 꽤 넓은 논이 펼쳐지는, 나지막한 산 아래의 한옥집이었다. 한적함을 만끽하며 두 계절을 신나게 지내고 난 뒤, 우리에게 첫 위기가 닥쳤다. 시나브로 가늘어지나 싶던 욕실과 부엌의 물줄기가 어느 날 뚝, 끊기고 만 것이었다. 주인 어르신은 이웃 농민이 예고 없이 지은 거대한 비닐하우스 다섯 동을 범인(?)으로 지목하셨다. 그 탓에 잘 사용하던 지하수가 고갈되었다!  동분서주 여기저기 알아보셨지만 꽁꽁 언 땅이 녹을 때까진 수도 공사를 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고군분투가 시작됐다. 난데없이 마당쇠가 된 장군은 주인댁에서 마련해 주신 커다란 말통을 들고 집 근처에서 수시로 물을 길어 날랐다. 발우공양하듯 깨끗이 먹은 그릇은 사찰 스타일로 최소한의 물을 사용해서 씻고, 샤워는 커다란 찜솥에 물을 끓여 찬 물과 섞어서, 볼 일은 일심동체(?)의 정신으로 꼭 둘이 한 번에 해결했다. 가끔 쫄쫄 물이 나오는 날에는 가능한 모든 그릇에 물을 받아 두었다. 그나마 아직 아기가 태어나지 않아 다행, 겨울이라 대충 씻으면 몇 일은 그럭저럭 버틸만하니 다행이었다. 뿐이랴, 여차하면 갈 데도 많았다. 기꺼이 문을 열어 준 집들에 마실을 다니며 샤워와 빨래를 해결했다. 


복병은 임신이었다. 입덧이 시작되자, 나는 온 몸이 코인 듯 세상의 모든 냄새를 감지했다. 고작 하룻저녁 쌓아 둔 그릇 몇 개의 냄새에 멀디 먼 침실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물기가 마른 집안에서 비린내가 난다고 킁킁대며 동동거렸다. 주변에서 콩나물처럼이나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동안 나는 왜 임신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외부의 세포를 받아들이고, 내 것과 합치고, 잘 자리 잡고 자라도록 열 달 동안 시시때때로 몸을 바꾸는 일은 생리적으로 꽤 버거운 적응이 필요한 사건이었다. 내 몸이 마음처럼 움직여주기는커녕 때로는 예측도 불가능했다. 못 견디게 잠이 쏟아지는가 하면 다음 날은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배가 고파 어질어질하다가도 먹자마자 돌아서서 모든 것을 토해냈다. 


너무 당연해 감사해 본 적 없는 ‘물’이 잠시 사라지고, 너무 당연해 도움 청할 생각도 못했던 ‘임신’이 더해졌을 뿐인데 곧 일상이 엉망이 되었다. 스트레스가 켜켜이 끼어 헝클어진 마음엔 매일의 말씀도 한가한 소리로 읽혔다. 아니 왜 성경엔 이렇게 마음에 안 와 닿게 당연한 말씀들만 써 있을까.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를 깨우고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깨어나셔서 바람과 성난 물결을 꾸짖으시니 바람과 물결이 곧 그치고 잔잔해졌다. (누가복음 8:24)”


그러던 어느 아침, 그 당연한 말씀 중 하나가 쿵 하고 마음을 울렸다. 그래, 우리 주님은 다스리시는 분이셨지. 풍랑에 휘말릴 때, 주님과 동행하는 이들은 끝내 폭풍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갈 줄 안다. 그 곳에서 묵묵히 사건을 겪어내는 가운데, 주님의 ‘당연한 주님 되심’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기에 마음의 평화를 붙들고 지켜낸다. 톰 라이트도 이에 대해 단호하게 말한 바 있다. “믿음의 선택은 절대적이다. 예수님을 신뢰하든지, 폭풍의 영향권 안에 남든지, 둘 중 하나다”. 


그건 꼭 일생일대의 큰 풍랑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거다. 말하기도 치사한 가랑비에 옷 젖고 잔펀치에 골병 드는 법이니, 매일 새로이 주님을 신뢰해야 살 수 있으리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할 것 같지만, 간사한 내 실체는 그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허청허청 휘둘렸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몇 일의 방정맞은 마음을 추슬러 올려드렸다. 오직 주님이 우리를 채워 주시기를. 모든 상황 속에서 예외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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