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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Mar 01. 2023

요리 예찬

묵상지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13년 3월호 기고문

십 년 전 연애 시절의 일이었다. 갑자기 밥을 해 주겠다고 나선 내게 장군이 주문한 요리는 ‘순두부 찌개’였다. 호기롭게 그를 초대해 놓고, 엄마의 레서피대로 ‘난생 처음’ 찌개를 끓였다. 다만, 돼지 고기가 없길래 베이컨을 넣었다. 아무렴, 베이컨도 돼지니까. … 그러나 아무리 끓여도 베이컨은 그 고운 분홍빛을 잃지 않았다. 뚝배기에 눌어붙어 탄내가 날 때까지 끓인 순두부 찌개를 맛있다고 떠 먹는 장군과 마주앉아 두 숟갈쯤 밥을 먹었을까, 도저히 더는 참을 수 없는 그것을 모조리 버리고 말았다. 


그 정도니까, 나는 내가 요리를 하리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결혼 후에도, 평일엔 집에서 잠이라도 자는 게 다행인 회사 생활 때문에, 주말엔 약속이 있거나 피곤했으니까, 식생활의 팔할은 외식과 배달이었다. 나머지 이할도 실은 즉석 식품과 반조리 식품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쌀이 썩어나갈 지경이었다. 


그러다 요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닥친 것은 다니던 교회 가까이 집을 옮긴 후였다. 여섯, 여덟, 열 명이 한 상에서 밥 먹는 날들이 시나브로 잦아지면서, 배달이나 반조리로는 버틸 수 없는 시점이 왔다. 사람들은 서툴기 짝이 없는 요리들을 그 옛날 장군처럼 무조건 맛있다고 칭찬(?)하며 밥그릇을 비웠다. 함께 하는 밥상의 기쁨을 배우자 요리가 조금씩 늘었다. 처음 김치를 담갔을 땐 다 이루었도다, 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친구들은 ‘지금의 너는 다아 우리가 만들었다’고 말하곤 했다. 


본격적으로 요리에 ‘탐닉’하기 시작한 것은 시드니에서 6개월간 외국인노동자(?)로 지내면서였다. 돈은 없고 시간은 많고 신선하고 다양한 식재료는 저렴하니 장군도 나도 요리가 일취월장했다. 여러 사람을 식사에 초대하고, 때가 되면 쿠키, 찰떡, 스콘 등을 구워 선물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마지막 한 달간 과수원에서 일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빵이 ‘그 날 딴 과일로 만든 파이’임을 배운 것은 요리의 또 다른 전기였다. 기본이 좋으면 별다른 것을 더 얹지 않아도 이렇게 천상의 맛을 내는구나! 


요리에도 여러 배움의 단계가 있다면, 요즘은 맛의 ‘기본’을 탐구하는 시기다. 완제품 소스에 의존하던 왕초보 시절을 지나 스스로 양념을 하게 된 후에도 당연히 마트의 매대에서 집어오던 토마토 케첩, 고추 기름 등등 비교적 기본적인 소스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원래의 재료들이 물리적으로 화학적으로 결합해 새로운 하나로 태어나는 그 오묘한 과정이 새삼스럽고 신기하다. 그렇다면 그보다 더 기본이 되는 재료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 걸까. 설탕은? 식초는? 파는? 마늘은? 생각이 점점 더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자, 가능한 한 가장 기초적인 재료들을 자급해 보고 싶어졌다. 마침 지난 해 이사한 집은 마당에 한 평 남짓의 화단이, 집 뒤엔 손바닥만한 텃밭이 있는 옛날 집이다. 이 봄엔 흙을 골라 씨앗을 심으려고 한다. 몇 해 전 호주 시골의 그 과수원, 우리 손으로 막 딴 과일에서 느꼈던 경이를, 텃밭 푸성귀에서 다시 맛볼 수 있을까. 


장군은 어제 함께 앉은 밥상에서 기도하며 “이 음식들이 우리에게 오기까지 수고한 모든 손길들”에 감사했다. 참말 그렇다. 그렇게 음식의 기원을 찾다 보면 결국 해와 흙과 바람과 물을 만난다. 묵묵히 씨를 뿌리고 그물을 내리고 기르고 거두고 다듬은 이들이 떠오른다. 요리를 하는 우리도 그 모든 손길들의 끝에 함께 서 있는 셈이다. 식탁엔 바다도 산도 들도 사람도 있다. 그러니 찌개 하나를 끓이는 게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생태계의 신비에 참여하는 일이라고까지 주장하면, 그건 너무 오바일까? 


어디 그 뿐이랴.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탁월한 영도력의 비밀’을 묻는 북한군 장교에게 동막골의 촌로는 간단한 현답을 내놓는다. “잘 믹이야지 뭐”. 그는 알고 있었다. 함께 만든 음식을 나누는 밥상만큼 서로를 끈끈하게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인간과 인간이 만나 이념까지 초월하던 현장이 밥상이 아니었던가. 그러고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시던 현장도 밥상이었다. 요리는 자연의 섭리와 인간 사이의 하나됨에 대한 배움, 반짝이는 크리에이티브는 오로지 단순하고 지난한 노동으로만 구체화됨을 배우는 수련이다. 아마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가장 오래된 유희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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